젊은이여 네 꿈을 펼쳐라 지은이:서한샘 차례 제1부 젊은날의 초상 새해에는 네 꿈을 펼쳐라 젊은이 지향하는 곳 인생은 항상 새롭게 출발한다 사랑, 그 위대함이여 너희들 세대의 목표 우리 몫으로 지녀야 할 시대 정신 고난은 우리를 유익하게 한다 제2부 뜨거운 가슴에 파묻는 노래 이 산하의 숨소리를 우정이 꽃피는 젊음 진실에 눈뜨는 시심 잊을 수 없는 선생님 봉사는 삶의 기쁨이요 보람인 것을 젊은 시절에 마음껏 독서하라 이제야 공개하는 사랑의 편지 제3부 살아있는 정신을 위하여 젊은이여, 이젠 우리도 비상하자 살아 있는 정신 네 의식의 성장을 위하여 한글 티셔츠로 내것 사랑을 삶의 전진을 생각하며 그 이름 백두산 제4부 생활의 창 회혼례를 경하드리며 어머님, 영면하소서 친우를 떠나 보내며 젊음은 희망이어라 시험장으로 향하는 제자들에게 한샘의 의지 제5부 아빠가 쓴 육아 일기 이야기를 시작하며 이제는 너희 차례다 내 나이 평생 가야 사십구 세라고 우겨 보지만, 이제 오십을 넘은 연륜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되는가 보다.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 그 나이대로 행세를 해야, 밀려오는 세대들이 편안하게 자신의 나이에 걸맞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 아니겠는가?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터진 지 삼 일 후에 내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다. 외과 골절이라는 진단과 더불어 수술을 하게 되었고 거의 두 달 가까이를 꼼짝 못하게 되었다. 하도 바쁘게 지냈기 때문에 좀 쉬엄쉬엄 살라고 하느님이 병을 준 것 아니겠느냐고 위로들을 해 주셔서 한바탕 웃기도 했지만, 하느님의 배려치고는 그 고통이 꽤 심했었다. 뿐만 아니라 새로 벌여 놓은 케이블 TV 사업하며 출판사, 학원의 업무 등이 산적해 있는데도 당분간 방관자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고, 대학원 강의와 그 외 예정된 이곳 저곳의 강연하며, 약속된 주례 등을 취소 연기하는 일은 더더욱 미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목발을 짚고 걸음을 옮기는 것도 진땀나는 일인 것을. 나는 이번 환자 생활 속에서 많은 것을 깨우쳤다. 아픈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 장애자의 삶이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인가 하는 깨달음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주변의 많은 분들, 교육계의 여러분들, 존경하는 선배님들, 동창, 후배, 친지들께서 보여 주신 따뜻한 위로와 격려에 나는 큰 힘을 얻었다. 더불어 사는 삶의 모습들을 나에게 가르쳐 주신 것 같아 감격하고 감사했다. 나는 환자 생활의 반대 급부를 얻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삼십여 년간 피워오던 담배를 끊기로 했다. 어차피 천대받는 담배인 것을 못 끊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리고 또 한 가지, 지나온 내 삶을 정리하기 위한 한 권의 책을 펴 내기로 했다. 7년 전 우리 출판사에서 "우리시대"라는 청소년 교양 잡지를 발간했을 때, 나는 내 지내온 삶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젊은이들을 격려하는 글을 연재했었다. 그러나 그 괜찮은 잡지가 청소년들의 외면으로 폐간되자 내 이야기도 중단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을 이번 기회에 마저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펴 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첫째, 그렇게 함으로써 나이 오십까지의 내 살아온 이야기를 마무리지어 내 과거의 이야기에서 해방되고 싶었고, 둘째, 그럼으로써 오십 이후의 내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새해에 새 가정을 이루어 새로운 세계로 도전해 나아갈 내 아들의 앞날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이 책의 발간이 무엇보다도 귀한 선물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은 주로 내 젊은 날의 회상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오늘을 고민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쓴 글들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한다는 것은 쑥스럽고 허전한 일이지만, 이왕 젊은이들에게 밝히기 시작한 이야기라면 그 끝을 맺고도 싶었다. 우리 시대, 어느 시대건 다 그러하겠지만, 우리 시대도 참으로 험난한 시대였다. 일제 말기에 태어나 남북 분단과 6.25전쟁의 공포를 어린 나이에 겪었고,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궁핍과 절망의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한 속에서 4.19, 5.16, 6.3 사태의 격동기를 보냈고, 제3공화국에 이은 유신 시대의 철권 정치, 뒤이어 박정권의 처절한 몰락을 목격해야만 했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우리 가슴에 남아 있고, 또 다른 군사 통치 속에 정권의 정통성 시비로 80년대를 허비하고 말았다. 그리고 천신 만고 끝에 이룩해 낸 문민 정부, 그 문민 정부가 나아갈 지평선 저편에 21세기를 지혜롭게 열어가야 할 수많은 난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숨가쁜 세월이. 그러나 우리는 믿는 데가 있다. 후진국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왔던 정치 형태가 시대고를 두려워하지 않는 수많은 분들에 의해 이제 바로잡혀져 가고 있고, 6.25 동란의 허허벌판 위에서 그 처절한 가난과 궁핍을 이겨내고 재건의 기적을 실현해 낸 우리 민족의 기상과 슬기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내 어렸을 때 GNP 50불도 되지 못했던 이 나라가 이제 내 나이 오십이 넘어 7,000불이 넘는, 그래서 이제는 선진국으로 분류해야 된다는 세계 각국의 압력이 모아지는, 그런 한국을 건설해 낸 것이다. 그 뿐이랴, 세계 곳곳에서 배달 민족의 끈기와 투지가 빛을 발하고 있고,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은 아직도 우리의 긍지로 남아 있다. 주가 그 일을 해 냈는가? 젊은이여, 바로 너희 부모님들이 이룩해 낸 일이다. 그것을 살펴 수긍한다면, 젊은이여,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삶을 치열하게 살아낸 너희 부모님들께 경의를 표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잘 살아 보겠다는 일념으로 앞만 보고 달려 온 후유증이 이곳 저곳에서 불거져 나오고, 물질 만능 풍조의 시대상으로 인해 타락된 인간성을 한탄하는 소리가 높기도 하다. 그러나 그 원인을 파악하고 있는 이상 우리 민족은 슬기롭게 치유해 나갈 것이다. "네 꿈을 펼쳐라" 이 외침은 오늘의 나를 버텨 온 나의 좌우명이다. 그리고 내가 세운 학원의 원훈이기도 하다. "네 꿈을 펼쳐라" 나는 여지껏 내 꿈을 펼치기 위해서 하루를 25시 삼아 치열하게 살았고, 앞으로도 내 꿈을 펼치기 위해 끝간데 없이 뛰어갈 것이다. 인생은 허망하고 부조리한 것이지만 그래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는, 인간의 삶은 매우 의욕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제 너희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젊은이여, 신세대 X세대라고 뽐내는 젊은이여. 그래서 의사 표현이 분명하고 자신의 일에 조금도 손해보지 않으며, 컴퓨터 조작에 능숙하고 자신의 행복 추구에도 자신만만한 젊은이여. 이제는 너희 차례다. 부모가 넘겨주는 바톤을 이어받아 이제는 너희들이 뛰어야 할 차례다. 그러기 위해 너희들이 건설할 미래의 세계를 예감하라. 그리고 너희들이 맞아야 할 시대적 사명감을 깨우치라. 네 가슴에 묻을 새로운 태양을 위해, 젊은이여,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을 준비하라. 뜨거운 가슴으로 현실을 안고 눈빛은 저 푸른 하늘을 보라. 그 푸르른 기상으로, 젊은이여 떨쳐 일어나 네 꿈을 펼쳐라. 1994년 세모에 서한샘 제1부 젊은날의 초상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부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새해에는 네 꿈을 펼쳐라 새해에 거는 새 희망 새해가 밝아 온다. 장중하게 떠오르는 태양이야 어느 땐들 뜨지 않겠는가마는, 새해 새 날의 아침에 맞이 하는 태양은 그 의미가 다르다. 지나간 세월을 후회하고 반성하며, 오는 세월을 다짐하고 계획하는 새 날 새 아침.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젊은이가 갖는 '희망'은 싱그럽고 눈부셔서 더더욱 좋다. 그러나 그 '희망'이 '계획성'과 '실천력'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한낱 공허한 몽상에 그치고 말리라.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짜고 일 년의 계획은 새 날에 짠다. 그리고 일생의 계획은 젊은 시절에 짜야 한다. 희망이란 무엇인가? 현대의 사상가 에리히 프롬은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라고 칭한다. '희망인'이란 뜻이다. 인간은 희망을 지니기에 소중한 존재이며, 희망은 인간을 규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희망이란 무엇인가? 희망이란, 미래를 향한 강한 용기와 의지의 씨앗이며 깨어 있는 자, 각성한 자의 꿈인 것이다. 젊은이여, 새 날에는 일기를 쓰자. 지나간 해의 이야길랑 접어 두고, 새 날에는 새해의 가슴 부푼 '희망'을 쓰자. 하얀 종이 위에 쓰여지는 너의 꿈. 설령 그것을 다 지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젊은이여, 새 날에는 일기를 쓰자. 꿈의 세계에 대한 소망 우리들의 '꿈'이란 무엇일까? 월트 디즈니의 만화 영화를 보면서 나는 찬탄을 금치 못한다. 그가 엮어내는 풍부한 상상력은 다 살아 있다. 나무도, 산도, 바다도, 바람도, 접시도, 가구도, 집도 그의 작품 속에서는 영혼을 가진다. 사랑을 나눈다. 눈물과 웃음을 드러낸다. 어른이 엮어 내는 완벽한 꿈의 세계, 월트 디즈니를 가진 미국의 청소년들은 그래서 행복하다. 일본 동경의 "디즈니랜드"를 구경한 적이 있다. 아이들 놀이터가 뭐 대단하겠느냐고 생각했던 나는 큰코를 다쳤다. Small World 보트를 타고 유람하는 인형의 집.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 각국 의상으로 차려 입은 소년 소녀 인형들이 동물과 함께 또는 꽃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 그곳을 가득히 메워 울려 퍼지는 청량한 노랫소리. 별 것 있겠느냐고 심드렁하게 여겼던 나는, 그곳을 나올 때 내 가슴 속에 잠시나마 자리잡았던 동심을 확인했다. 그리고 일본의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려고 노력하는 일본의 기성 세대들이 두려웠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저렇게 거대하고 예술적인 '한국의 꿈동산'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몸을 떨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꿈과 정서와 슬기를 심어 주어야 하는데... 이 일을 누가 해야 하나? 누가 해야 하나? 우리 아이들에게 심어 줄 꿈 이제 우리 집 애들은 어엿한 성인이 되었지만, 그 애들이 어렸을 때, 나는 애들을 데리고 자주 한강가를 산보했었다. 한강은 밤풍경이 더 신비스럽다. 양화대교에 명멸하는 자동차의 불빛. 강변의 불빛에 반사되어 한강은 보석처럼 반짝인다. 상쾌한 강바람에 휘파람을 날리는 기분도 좋다. 우리는 잠시 강둑의 풀밭에 앉는다. 망막에 한아름 가득 들어 오는 하늘. 무수한 별빛. 미리내(은하수) 너머 곰자리가 우리를 부른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어느 별에선가 우리를 손짓하는 것 같다.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달님 속에서 동화 속의 토끼들은 어김없이 방아를 찧으렷다. 나는 우리 애들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준다. 할머니가 들려 주고, 어머니가 들려 주던 태고적 아스라한 이야기들. 그래서 나도 애들에게 들려 줄 수밖에 없는 그 그리운 옛이야기. 저 달님 속에 항아 아씨가 어떻게 살고 있고, 그녀가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는가를 정감 어린 목소리로 열심히 들려 준다. 그리고 '별 하나 꽁꽁 나 하나 꽁꽁, 별 둘 꽁꽁 나 둘 꽁꽁..."하며, 별에게 나의 소망을 파묻는 방법을 신나게 들려 준다. 그러나 응답이 없다. 아이들의 얼굴을 본다. 애들은 재미 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지만 그 표정은 이미 감동이 아니다. 아빠가 얼마나 거짓말을 잘 하는가를 그 애들은 즐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애들에게 달님은 그저 암스트롱의 발자국이 찍힌 거대한 별에 불과한 것이다. 저 하늘의 별은 다만 어떤 외계인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를 삭막한 제3 세계에 불과한 것이다. 과학적 지식은 이미 우리의 환상과 정서를 앗아간 것이다. 그리고 전설은 이제 무지의 소산으로나 존재하는 것이다. 아, 우리의 꿈이란 무엇일까? 오기로 버틴 자존심 나는 고통스러운 젊은 세월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6.25의 아픔과 빈곤에 허덕여야 했던 1950년대, 60년대를 보낸 기성 세대 누군들 상처 없는 사람이 있으랴만, 나 또한 그 중의 하나가 되어 극심한 가난과 고독의 와중에서 고통받았었다. 고등 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스스로 의식주 생활을 해결하며 공부해야만 했었다. 좌절과 절망과 오기와 분노로 세상에 머리받이를 하면서 살던 나의 청소년 시절. 가난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에 꽉 차오르는 서러움들. 언젠가, 나는 꼬박 삼 일을 굶었다. 그것은 다이어트가 아니었다. 먹고 살아야 하는 생존의 치열함에 있어서 내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냄비 바닥에 붙어 있는 누룽지까지 동을 낸 뒤, 나는 먹기 위해 허덕이는 내 몰골이 스스로 더러워서 아예 눈을 감고 드러눕기로 작정했다. 무덤 같은 나의 골방에 불기가 끊긴 지도 오래였다. 그까짓 몇 끼 못 먹는다고 사람이 죽나? 내 배짱은 두둑했다. 그러나 한 밤이 지나고 한 낮이 가고, 나는 서서히 죽음을 생각했다. 차라리 이 방에 지진이 나서 방바닥이 둘로 쪼개지고 그 속으로 영원히 잠기기를 나는 소망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이 별 볼 일 없는 세상을 떠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차라리 사치였다. 몰려 오는 허기는 내 사고마저 텅 비게 만들고, 배가 고파서, 외로워서, 그리고 슬퍼서 나는 눈물만 흘렸다. 삼 일을 굶었는데도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람만이 문풍지를 울릴 뿐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다.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비틀거리고 일어섰다. 그리고 가난하긴 하지만 늘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던 사촌 형님 댁을 떠올렸다. 한 끼 밥을 얻어 먹자. 한 끼만 얻어 먹자. 토담집 쪽문, 쪽문을 열면 바로 부엌, 부엌에 연이은 단칸방. 그곳이 사촌 형님 댁이었다. 형수님은 나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되련님(도련님), 그 동안 왜 소식이 없었어요? 지내기 힘들지 않아요? 밥 안 먹었지요? 잠깐 기다려요. 내 금방 밥 지을께." 형수의 그 따뜻한 말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쏟아지려는 눈물을 삼키며 나는 어두컴컴한 방 구석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며, 국물 뜨는 소리를 느꺼워하고 있었다. 아, 숨결을 타고 폐부로 스미는 구수한 밥 내음. 그것은 차라리 그리움이었다. 내 뱃속은 요동치고, 내 온몸은 달아오르고 있었다. '어서 가져와요. 어서요. 반찬은 필요 없어요. 밥만 있으면 돼요.' 터져 나오려는 목청을 나는 이를 악물고 막아 내고 있었다. '이젠 다 차려졌을까?' 그 순간, 나는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그리고 밖으로 뛰쳐 나왔다. 거기 형수가 상을 받쳐 들고 서 있었다. 나는 신발도 꿰는 둥 마는 둥 쪽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되련님, 어디 가요, 밥 안 먹고?" 형수의 외침을 뒤로 하고 나는 국민 학교 담을 따라 마구 뛰어 내려 갔다. 눈물 범벅이 되어 얼마나 뛰었을까? 마음 속에서 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바보같이... 왜 안 먹었어? 밥이 바로 눈 앞에 있는데, 왜 안 먹고 뛰쳐 나왔어?' 코 끝을 맴도는 밥냄새. 그러나 또 하나의 내가 강하게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 밥은 먹을 수가 없는 거야. 네가 단순히 놀러가서 밥을 먹는다면, 그거야 좋지. 그러나 그곳에 간 이유가 뭐였지? 얻어 먹으려고 작정했던 거지? 그렇지? 그렇다면 너는 구걸을 간거지? 빌어먹으려 했던 거지? 그렇다면 깡통을 들고 집집마다 두드리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지? 그런 밥은 먹을 수 없어.' 전신주를 부둥켜 안고 나는 왜 밥을 먹지 못했나 하는 회한과 구걸하지 않았다는 오기의 틈바구니에서 오열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최후의 오기였다. 그러나 젊은 날의 그 오기를 나는 지금도 감사한다. 소나기처럼 내 몸을 척척 휘감는 빈곤 속에서도 내 영혼이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까지도 던져 버릴 수 없었던 자존심 때문이었으리라.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지금은 주류 선전에 쓰이는 이 문구가 젊은날의 내 좌우명이었다. '운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결코 복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운명'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 노력 하나만으로라도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너의 빈 노트에 꿈을 수놓아 채우라 새해 새 아침엔 우리들의 '꿈'을 그려 보자. 비록 현실이 견디기 어렵고 네 삶이 너를 속일지라도, 빈약하게라도 아니 소박하게라도 우리의 '꿈'을 설계해 보자. 꿈을 꾸는 사람은 풍성해서 좋다. 꿈을 꾸는 사람은 눈빛이 맑아서 좋다. 젊은날의 고뇌가 꿈을 좀먹더라도 새 살이 돋아나도록 젊음의 순수한 열정을 뿜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젊은이다운 것이다. '내 젊음의 빈 노트에 무엇을 채워야 하나?'라는 노랫말이 공허해선 안 된다. 끈질기게 모색하고 부딪치고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의 실현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마음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념도 의지도 실천의 여부도 모두 마음 속에 있다. 내가 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의 꿈의 실천에 매진하라. 공부하는 곳에서 기쁨도 찾고, 일하는 속에서 내일을 밝히고, 고통 속에서 결실을 예감하며, 우리 젊은이는 새해를 열어야 한다. 을해년 돼지해. 새해 새 아침엔 좋은 돼지꿈이라도 꾸자. 마음의 풍요를 기원해 보면서 우리의 자존심을 치켜세우는 한 해를 만들어 보자. 을해년 새해에 이 땅의 젊은이여, 네 꿈을 펼쳐라. 젊음이 지향하는 곳 열병처럼 치러지는 대학 입시 대학 입시의 뜨거운 열풍이 휩쓸고 지나간 빈 자리에, 스산한 바람 따라 지다 만 낙엽이 쓸쓸히 떨어진다. 바들거리는 새가슴으로 시험장 문을 들어서던 너의 작은 어깨. 시험 잘 보겠다고 엄마를 위로하던 네 눈빛은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교문 앞을 서성이며 묵주를 열심히 돌리던 너의 엄마. 그러나 이제 시험은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최선을 다한 만큼의 보상을 기다릴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다. 우리 시대에도 대학 입학의 경쟁은 치열했다. 고3이 되자 본격적인 입시 준비에 몰두했고, 주변을 돌아볼 다른 여유는 전혀 없었다. 입시가 끝났을 때, 휴지 조각처럼 던져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로 가 버렸고, 대학이란 열차에 동승하지 못한 나는 구겨진 채로 어둠 속에 처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어둠의 구석에 산이도 있었다. 산이를 보면 내 고생이 위안을 받을 만큼, 그는 가난의 극한 상황을 용케도 잘 견뎌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여기서 주저앉지 말자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듬해의 입시에서도 우리는 날지를 못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고, 다시 한 번 날아보자고, 그와 나는 비장한 결심을 나누었다. 그리고 불같이 공부했다. 서로의 자취방 방문도 삼가하며 그렇게 1년을 또 버텼다. 드디어 어김없이 입시철은 왔고, 우리는 의논 끝에 같은 대학에 원서를 냈고 함께 시험을 치렀다. 합격자 발표날, 산이도 나도 대학에 가 볼 용기가 없었다. 어느 친구와 길을 가다가 합격자 명단이 실린 신문을 샀다.(당시에는 신문에 각 대학의 합격자 명단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이름을 찾아 볼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나는 친구에게 내 이름이 있나 없나 살펴봐 달라고 이르고는 마치 100m 경주하듯 달려서 내 방으로 숨었다. 무덤 같은 골방에 누워 나는 폐쇄되어 가는 숨결을 힘들게 내뱉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친구의 환호 소리가 천정을 뚫었다. 천신 만고 끝에 드디어 나는 합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산이의 이름은 없었다. 혼자 자취해 가며 고생고생하던 심지 굳고 의리 있는 산이. 나는 그놈의 자취방을 찾아 가면서 나의 합격을 증오했다. 산이는 쌀을 씻다가 나를 맞아 주었다. "너, 떨어졌어." 나는 온 힘을 다해 매몰차게 내뱉었다. 움찔하던 산이가 조용히 물어 왔다. "너는?" "난 붙었어. 임마." 화난 기분으로 내가 말했다. "축하해, 정말 기뻐. 난 걱정하지 말아. 어차피 안 되면 또 한번 재수하려 했으니까." 감정을 억제하며 환히 웃어 주는 산이의 손을 잡은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1년 동안, 나는 그 달고 싶었던 대학 배지를 책상 속에 넣어 두었다. 산이가 합격하면 같이 달려고, 합격의 기쁨을 잃어버린 나는 괴롭게 학교에 다녀야 했다. 산이는 다음 해 대학에 합격했다. 도대체 시험이란 무엇일까? 대학은 인격을 도야하고 삶의 폭을 넓히며 학문의 세계에 심취하는 곳이라는데, 그 입학 자격을 몇 시간 동안의 시험만 가지고 무우 썰 듯 판결해 낼 수 있는 것인가? 무엇인가 맥이 통하지 않는 현실적 제도 속에 너희들의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지고, 너희들의 가슴은 납덩이로 변해 간다. 진숙이에 대한 추억 시험을 포기하고 직장을 준비하는 많은 젊은이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가난은 고통스러울 뿐 부끄러운 것은 아닌데, 고민하고 가슴 아파하다가 자신의 삶의 길을 새롭게 설정해나가는 젊은이들의 의지가 대견스럽다. 직장에 다니며 야간 대학에 진학했던 진숙의 열의가 새삼스럽게 가슴을 저며 온다. 진숙이는 갸름한 얼굴에 슬픈 눈빛을 지닌 말없는, 그래서 친구와 어울리지 않는 조용한 소녀였다. 나는 그 아이가 고2, 3이었을 때 연거푸 담임을 맡았었다. 고2 어느 가을, 학교 앞 중국집에서 짬뽕을 시켜 놓고 창 밖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데 지나가는 진숙이가 보였다. 문득 진숙이와 함께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불러 앉혔다. 진숙이는 예의 조용한, 말없는 태도로 부끄러워하며 짬뽕을 먹었다. 그 아이에게서 편지를 받은 것은 며칠 후였다. "...선생님, 저는 그 날 짬뽕을 처음 먹어 보았어요..." 그 글귀는 나에게 충격이었다. 어찌 짬뽕을 처음 먹어 보았을까마는 아마도 의식을 가지고 먹어 본 짬뽕은 처음이었나 보다. 그 이후 나는 늘 우울한 그 아이를 즐겁게 해 주려고 애썼다. 진숙이 결석한 어느 날, 진숙이 어머니가 나를 찾아왔다. 진숙이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면도칼로 동맥을 끊으려 했단다. 그리고 담임 선생을 찾더라는 것이다. 문래동 허름한 골목길을 걸으면서 나는 답답한 가슴 속으로 까닭 없는 분노를 삼키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허연 붕대를 팔뚝에 감고 있는 진숙이를 발견하고 나는 말을 잃었다. 진숙이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대했다. 나는 진숙이 팔을 거칠게 잡아 끌어 붕대를 풀었다. 진숙의 아픔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깊게 패인 칼날 자국을 내 팔뚝에 옮기고 싶었다. "바보같이, 바보같이..." 절규하는 내 목소리는 다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어떻게 그 아이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 인간의 언어란 가슴 속 깊은 응어리를 풀어헤치는 데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 실직한 아버지. 살림을 돕겠다고 직장 전선에 나선 어머니. 그리고 부모의 불화. 별거. 자식들이 무슨 종잇장인 양 둘로 나눠 각각 살림을 차린 동강난 가정. 진숙이는 놀랍게도 토큰 한 개 없이 학교로 향했던 때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러니 작은 가슴에 커다란 슬픔과 수치심과 모멸감이 얼마나 가득 들어 찼을까? 꿈을 가지라고? 어버이를 공경하라고? 도대체 건조하게 반복되는 학교 생활이 진숙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터져나가는 가슴으로 누구에게도 위로 받지 못하던 진숙의 작은 어깨를 끌어 안고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그리고 나는 진숙의 부모를 증오했다. 기성 세대의 고통을 무책임하고 무절제하게 자식들에게 떠 맡긴 그들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진숙은 용케도 졸업을 했다. 그리고는 어느 조그마한 회사에 취직을 했다. 첫 월급을 탔다고 넥타이를 사 들고 학교에 찾아온 진숙에게 나는 소리 없는 박수를 보냈다. 훌륭하게 고통을 이겨 낸, 아니 견디어 낸 진숙이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진숙이는 이태 뒤에 야간 대학에 진학했다. 승리를 예비하는 고통 그렇다. 고통이, 가난이, 세차게 몰려올 때에는 잔뜩 몸을 움츠리는 것도 좋으리라. 세월이 흐르면 그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고통과 가난의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고통의, 가난의 생활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힘을 키우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다수의 젊은이들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어렵게 그들의 젊음을 키워 간다. 그리고 더러는 가난이라는 멍에 속에 안간힘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젊은이여, 비록 허리가 휘청거리도록 가난이 내 몸을 감싸도 정신만은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떨궈지려는 머리를 오히려 꼿꼿이 세우고 정신만은 거만해져도 좋다. 비굴해지기보다는 차라리 거만한 편이 가난한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려무나, 젊은 시절 미완성의 시기에 시련을 주시는 하늘의 뜻을. 달궈지지 않은 쇠, 두드려지지 않은 쇠는 단단해질 수 없다. 무지개는 반드시 소나기 그친 뒤에야 영롱하게 뜬다는 것을 젊은이여, 음미하자. 우리는 온실 속의 장미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서리 내리는 들판의 들국화가 되기를 원해야 한다. 온실 속의 장미는 제 향기에 취해 스스로 죽어가지만, 들국화는 대자연 속에 마음껏 제 향기를 발산한다. 그리고 제가 자란 토양을 알고, 이웃나무의 아픔을 알고, 짓궂게 장난 거는 바람과 유리알처럼 맑고 높은 가을 하늘을 안다. 온실에서만 자란 꽃이 어찌 이토록 넓은 세상을 알 것이며, 이토록 진한 체험을 할 수 있겠는가? 젊은이여, 반드시 이겨 승리할 수 있다면 차라리 고통을 택하라. 영광이란 단어는 고통 다음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인간 승리 이 말은 편안하게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편안하게 삶을 사는 사람들, 그들은 고통이 없었기에 진실된 삶의 모습을 알지 못한다. 인간 승리 이 말은 팽개쳐진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말할 권리가 있다. 밀려 오는 고통의 파도를 잠재우고 우뚝 선, 천년의 사연을 함묵한 의지의 바위. 그런 사람만이 인간 승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젊은이여, 내가 고통스럽다면 오히려 고통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라 그 분은 너에게, 고통 뒤의 희열도 함께 예비해 놓으시니까. 인생은 항상 새롭게 출발한다 합격 불합격의 냉엄한 현실 대입 합격자 발표장은 환호와 탄식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웃음을 터뜨리며 주먹으로 손바닥을 두드리는 사람, 길게 목을 빼고 자신의 번호 확인에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 탄성과 더불어 친구의 어깨에 올라타는 사람, 사람, 사람... 그러나 눈물을 글썽이며 어금니를 굳게 깨무는 여학생도 그 속엔 있었다. 안경을 벗어든채 하염없이 빈 하늘만 쳐다보는 남학생도 교정 끝에 보였다. 대학 입시 사회로 발돋움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입학 시험이라면, 합격 불합격의 갈림길이야 어쩔 도리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어깨를 움츠리고 돌아서는 너희들의 가슴에 무슨 말인들 위로가 되랴? 합격자 발표장 그곳은 마치 인생의 행로를 결정 짓는 냉혹한 저울대 같았다. 30여 년 전 세월을 반추하며 442번, 그것은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나의 수험 번호이다. 그 번호를 확인하기 위해 살아야 했던 고교 3년. 이제 나는 부끄러울 것 없지만, 그래도 공개하기 싫은 내 입학기의 이야기를 젊은이들에게 들려 주려 한다. 나 혼자 체험한 세계를 공개한다는 것은 간직한 비밀을 잃는 것이라 허전한 노릇이지만, 체험자의 이야기가 젊은이들의 삶에 도움이 된다면 나의 인생 한 구석을 보여 준들 어떠랴? 첫해 대학 입시의 실패와 좌절 우리가 대학 입학 시험을 볼 때에는, 국가 고사라는 것이 난데없이 생겨 단 2년 시행되고는 없어졌었다. 60년대 초 4.19와 5.16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의 고교 생활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 극심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대학 입시를 위한 우리의 준비는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대학 입시 국가 고사가 어떻게 시행되었는가를 잠깐 소개한다. 우선 전국의 수험생들에게 지원 학과를 미리 신청 받는다. 어느 대학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 학과만을 지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문과의 전국 대학 입학 정원이 2천 명이라면, 정원의 2배수인 4천 명을 일률적인 국가 고사(예정의 학력고사와 유사함)로 선발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학과에 따른 선발 인원이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고, 어느 학과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행 불행이 뒤따르는 입시 제도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 고사 점수를 가지고, 각 대학의 정원의 누계를 감안하여 대학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2배수로 선발되었기에 또 한 번 경쟁을 치르게 되는데, 그것이 체력장이었다. 그 당시 처음 도입된 체력장은 다섯 종목으로 기본 점수 없이 총 50점 만점이었다. 현재 국어를 가르치는 나는, 실은 이과생이었다. 그 무렵 가장 인기 있는 학과는 화공과였고, 나도 시류에 따라 화공과를 지원했다. 화공과를 나오면 어느 분야에서 종사하게 되는지조차 나는 잘 모르고 있었다. 다만 화공과가 최고의 인기 학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화공과를 지원한 나의 무지를 나는 지금도 부끄러워한다. 아무튼 객관식 국가 고사를 최선을 다해 치렀고, 나는 합격했다.(합격했다는 말을 화공과 전국 입학 정원의 2배수 안에 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화공과의 전체 점수 분포대와 내 점수를 비교해 보니 소망하는 대학의 지원이 꽤 불안했다. 체력장에서 점수를 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화공과 이외에는 갈 수가 없으니, 나는 다른 대학의 화공과에 원서를 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공개하고 이야기를 계속하자. 나는 우리집 만득이로 태어났다. 위로 누이 넷이 있었는데 내가 태어나기 전, 맏누이는 이미 출가하여 아들을 두고 있었고(내게는 손위 조카), 막내 누이가 이미 열 살이 넘어 있었다. 아들을 낳아야 대를 잇는다는 일념으로 드디어 내가 태어났지만,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님은 50세에 가까우셨고, 누이들은 누이가 아니라 아줌마들이었다. 고등 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우리 집은 파산이 되었다. 사촌 형님 댁에서 더부살이 생활이 시작됐고, 고 2,3학년 시절 나는 내가 벌어서 학비도 충당하고 학용품도 사서 써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신나게 학교를 다니고 공부하고 활동했다. 대학 입학금 그것은 내게 있어 그림의 떡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어디선가 그 돈이 나올 것처럼만 여겼다. 나는 지원한 대학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고, 장학생 선발 시험까지 치렀다. 그리고 합격했다. 그러나 입학 등록 절차를 마쳐야만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규정은 참으로 야속했다. 생각해 보라. 홀로 식생활을 해결해야 되는 나에게 어찌 대학 입학금의 거금이 있으랴. 돈을 마련하려고 뛰어 보았지만, 결국 나는 내 자존심에 상처만 가득 입은 채 포기해야만 했다. 등록 마감날, 나는 술 한 병을 들고 야산에 올랐다. 하얗게 눈 덮인 산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눈이 눈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수 윤항기의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다. "뭐 그런 거지, 뭐 그런 거야..." 나는 처음 먹어 보는 술로 나를 둘러싼 냉기를 쫓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너무도 추웠고, 정직하게 펼쳐진 하얀 눈빛은 나를 냉소하고 또 냉소했다. 눈은 차갑다. 눈은 몰인정하다. 깨끗한 척 위장하지만, 결국 눈은 술 먹은 가슴보다도 더 후둘거리게 나를 몰아붙였다. 그날 저녁에 터뜨렸던 메아리 없는 울부짖음. 나는 눈 덮인 야산에 버려진 한 마리 들짐승이었다. 방황의 늪에서 허덕이던 젊음 모든 것이 바뀌었다. 대학에 간 자와 못 간 자가 가려진 다음날부터 모든 것은 바뀌어 있었다. 고교 시절의 푸르름이 진실이었던가? 진정한 친우라고 믿던 그가 정말로 나를 이해했던가? 선생님은 이제 대학을 못 간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분이 아닌가? 어머니의 애처로운 모습에서도 나는 도피하고 싶었다. 자격지심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미 모든 것이 내게는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팔뜨기의 눈을 하고 나는 숨어 살아야 했다. 길을 가면서도 나는 제발 아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기를 빌었다. 얼굴에 하얀 꽃을 피우면서 나의 골방 생활을 계속되었다. '회색과 분홍빛으로 된 천정을 격해 놓고, 이 밤에 쥐는 나무를 깎고 나는 가슴을 깎는다.'는 노천명의 글귀를 나는 이해한다. 그랬다. 내 가녀린 가슴을 깎고 깎아서 나는 차라리 말라 죽기를 바랐다. 그러나 당장 오늘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나에게 무섭게 몰려 오는 고독은 사치인지도 모른다. 아무 희망도 없는 채로 나는 그날 그날의 식생활을 걱정해야 했다. 그리고 삶에 허덕인다는 것이 내 사고력을 정지시켜 주어 차라리 좋았다. 나는 노동판에 뛰어 들었다. 고철 줍기, 야산에서 흙 파기, 짐수레 끌기, 신문팔이, 찹쌀떡 장사, 조개 캐기, 생선 장사... 그러나 뻥 뚫려 버린 내 가슴 한가운데로 허허로운 바람만 지나갈 뿐, 어느 행위도 내 허전함을 진정시켜 주진 못했다. 나는 생각해 냈다. 군에 입대나 하자. 나는 성적만 좋으면 미국 유학도 시켜 준다는 공군 하사관 모집에 응했다. 하사관 그것은 거의 직업 군인을 뜻한다. 그 군대 속에 나를 꽁꽁 묶어 두고 싶다고 그 때는 생각했다. 대전 공군 하사관 학교에서 처음으로 군대 밥을 대하고 울컥 울음을 쏟았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환경 속에 나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내일이면 군번을 받는 날, 그리고 군번을 내 가슴에 달면 나는 꼼짝달싹할 수 없다는 것을 문득 자각하면서 꼬박 밤을 새웠다. 그리고 그 이튿날 새벽, 철조망 밑을 기어서 빠져 나온 나는 대전 역에서 내 주머니의 모든 것을 털어서 기차표를 사고 있었다. 둘째 해 대학 입시의 선택과 포기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나니 어김 없이 입시철이 다시 찾아 왔다. 내 가슴은 절망 속에서도 서서히 입시의 열병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어떻게든 대학은 가야만 했다. 그 이외에 나에겐 돌파구가 없었다. 그러나 대학 등록금이란 커다란 암석이 나를 마구 짓눌렀다. 내 곁에는 상의할 아무도 없었다. 아니, 내 스스로 누가 있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나의 자존심이었다. 어느 대학을 어떻게 갈까? 고민 속에 떠오르는 어머니 얼굴. 아버님을 잃은 후, 외아들인 나를 희망의 전부로 여기시는 어머니. 아들의 처지를 돕지 못하시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내겐 큰 소리 한 번 못 하시고 침묵한 채 살아가시는 가여운 우리 어머니. 나에게 시급한 것은 어머니를 빨리 모실 수 있는 방법의 강구였다. 나는 현실 속에서의 최선이 무엇인가 열심히 생각했다. 그리고 교육 대학(그 때 교대가 처음으로 생겼고, 2년제였다.)에 원서를 제출했고, 나는 다행히 합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얼마 안 되는 등록금이 문제였다. 나는 나의 재산을 모두 생각해 냈다. 반쪽이 잘려 나간 앉은뱅이 책상, 사발시계, 책 몇 권, 이부자리. 나는 서랍 속에 간직된 상장들을 꺼냈다. 국민학교 2학년 성적표, 중, 고등 학교 성적표, 개근 상장, 우등 상장, 글짓기대회 상장, 졸업장 한 묶음의 상장을 추리면서, 나는 속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세상의 어느 분이든 나를 사십시오 나를 저당 잡으십시오. 이 상장들은 내 삶의 모든 것입니다. 이것을 잡고 나에게 등록금을 빌려 주십시오. 아주 달라고는 안 합니다. 반드시, 반드시 갚아 드릴테니, 제발 나를 저당 잡아 주십시오." 나는 그 상장들을 둘둘 말아 허리에 끼고 나를 도와 줄 은인을 찾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어느 분의 도움으로 나는 드디어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열심히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그렇게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으나, 대학의 선택이 어머니를 핑계 삼은 현실과의 타협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몹시 괴롭혔다. 내 스스로의 주체적 판단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현실을 도피하듯 어머니를 둘러댄 것이 마치 물에 녹지 않는 기름처럼 나를 대학에서 멀어지게 했다. 고독과 방황은 아직도 끝나있지 않았었다. 풍금실만을 들락거리다가 5월말께 나는 드디어 휴학계를 제출하고 말았다. 젊은이들이여. 휴학을 전후해서 몰려왔던 나의 고민과 회의는 거의 내 정신을 앗아갈 지경이었다. 내가 교대를 택한 것은 어머니. 어머니 때문이었다. 2년을 빨리 수료하고 국민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 불쌍하신 우리 어머니를 내가 모실 수 있다는 소망 하나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엇인가? 나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갈구의 소리를 나는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인가? 고등 학교 때 내가 꿈꾸었던 미래가 허무하게 꺼져 버려도 되는 것인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것이 미래를 위한 시련이라고 거짓 머리짓을 하던 내 패기는 오히려 나에게 안주를 거부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소학"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훼상이 효지시야오, 입신행도하고 양명어후세하야 이현부모이 효지종야니라. 그 당시 이 글귀는 내 결심을 굳히는 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다. 어머니가 진정 기뻐하실 일이 무엇일까?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떨쳐, 이로써 부모를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 효도의 끝' 이라고 공자님은 말했거늘 어머니를 핑계삼아 내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어머니를 위한 진정한 '효'인가? 아니었다. 아니었다. 오히려 내 소신과 포부를 펴서 내 스스로 떳떳하게 서는 것이 어머니의 소망일 것이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 그것은 비록 식생활은 해결될 수 있을지언정 자신을 속이는 일이었다. 나는 떨려 오는 마음으로 속으로 다짐했다. '어머니, 저는 저의 길을 갑니다. 그것이 설령 제 착각에 의한 선택일지라도 저는 제 길을 가고 싶습니다. 아니, 시험이라도 해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를 모실 수 있는 기간을 좀더 길게 잡아 주십시오. 그것이 십 년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어머니, 슬픈 현실을 견디면서 기다려주십시오. 그 동안에 만일 어머니께서 어떻게 되신다면... 아, 생각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제 가슴엔 씻지 못할 한이 서리겠지요. 그러나 어머니, 저는 가야 합니다. 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셋째 해 재도전 그 치열한 의지의 발산 휴학계를 제출한 나는 마지막으로 내 뿌리를 시험하기 위한 칩거 생활로 들어 갔다. 그것은 뼈를 깎는 듯 몰려 오는 고독과, 그 고독을 거부하는 내 몸짓의 혈투였다. 그러면서 나는 자칫 흩어지려는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책으로 책으로 침전하고 있었다. 출발이 늦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출발이 늦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시험하는 마지막 이 기회를 잃지 않으려고 나는 내 모든 것을 완전 연소시켰다. 잠을 자다가, 한 줄기 핏줄이 저 폐부에서부터 목을 타고 올라와 코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느낌을 받고는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을 대 본다. 그러면 시원한 한 자락 소나기인 양 코피가 주르르 손바닥에 쏟아지곤 했다. 공부로 하여 내 몸을 혹사시키고 그것이 코피로 확인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희열을 느끼곤 했다. 그 지리하고 기나긴 반 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튼 어김없이 또 입시철은 다가왔다. 어느 대학 무슨 과를 선택할 것인가? 모든 것은 내 결정에 달렸다. 이제 나는 현실을 직시하는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합리적 사고 속에 나는 서울 대학교 사범 대학을 택했다. 그러면 선생이었다. 이왕 교사가 된다면, 어떤 교사가 될까? 나 같은 환경의 아이들에게 참벗이 될 수 있는 선생이 되고 싶었다. 국어과. 고교 때 이과생이었던 나는 이렇게 해서 문과로 내 진로를 스스로 바꾸었다. 이미 시험은 대학별 주관식 입학 고사로 바뀌어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나는 철저하게 나를 부수어 책 속에 매장해 나갔다. 공부하다가 죽는다면 차라리 그것은 행운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당당히 원서를 냈다. 그러나 이건 또 무슨 일인가? 18.2대 1. 내가 지원한 국어과의 경쟁률이었다. 20명 모집에 364명 지원이라니.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나를 두고 한 말이었다. 예비 소집일 날, 빡빡 깎은 머리에 고교 교복을 입은 또랑또랑한 학생들 모습에 나는 지레 질려 버렸다. 땅 속으로 기어드는 나 스스로를 간신히 지탱하기도 어려웠다. 내일이 시험인 그 밤에 나는 거의 꼬박 밤을 새웠다. 시험 전날은 푹 쉬라고 누가 충고했던가?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가 확인한 그 애들의 자신 있는 눈빛을 떠올리면서 나는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야 했다. 시험날, 나는 하느님께 매달렸다. 나는 꼭 합격해야 한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나는 하느님께 사정했다. 달랑 8문제 출제된 수학 시험지를 받아들고 내가 생각했던 것은 아버님 돌아가신 이후 지난 4년의 아픔들이었다. 마지막 시간에 치른 화학 시험에서 듣도 보도 못한 객관식 문제를 대하고는 나는 드디어 하느님께 타협을 간청했다. '하느님, 난 합격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꼭 맞춰야 합니다. 나를 맞게 하소서. 그렇게 하시면 당신의 뜻대로 평생을 살겠습니다. 만약 이 문제를 틀리게 하신다면 나도 당신을 좇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협박이었다. 나는 정성스럽게 연필을 굴렸고, 선택된 번호를 하느님이 지정해 주신 정답으로 확신하고 주저없이 써 넣었다. 나는 드디어 합격했다. 442번. 내 번호는 거기에 있었다. 한가지. 내가 우리 과의 수석을 차지한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는 기적이다. 주체적 선택에 후회란 없다 젊은이여,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는 것은 쑥스럽고 허전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내 이야기를 스스럼 없이 들려 주는 것은, 영광의 갈채를 받는 사람보다도 고통을 당해 안경을 벗고 빈 하늘을 바라보는 쓸쓸한 젊은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삶이란 무엇인가? 삶에 행적이 있다면, 그것의 궤적은 무슨 힘에 의해서 어떻게 그어지는 것일까?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내가 그 당시 화공과를 순조롭게 입학하고 졸업했다면 나는 지금 어느 공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일하고 있을까? 내가 만일 공군 하사관 학교에서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어느 부대에서 고참 상사 노릇을 하고 있을까? 내가 만일 거부의 몸짓을 토닥거릴 수 있어 그대로 교대를 졸업했다면 나는 지금 어느 낙도에서 코흘리개 아이들과 생활하고 있을까? 대학에 다니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내 거부의 몸짓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그러면서 내 삶의 궤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모든 것이 내 주체적 의지에 의한 선택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후회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학에 가고 안 가고의 문제보다, 무슨 일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결정을 누가 내리고 누가 행했는가에 있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한 번밖에는 살 수 없는 일회성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뜻, 뜻의 세움이라고 생각한다. 방황하는 것, 그것은 젊음의 특권이다. 좌절하는 것, 내일을 위해 오늘을 앓는 것, 그것 또한 젊음의 특권이다. 젊다는 것은 미완성을 뜻하고, 미완성이기에 완성을 향한 몸부림은 귀한 것이다. 그러나 먼 훗날 어떤 모습으로 설 수 있는가는 전적으로 네 의지와 선택에 달려 있다. 오늘이 추운 젊은이여. 굳이 기대려고 하지 말라. 인생은 항상 새롭게 출발되는 것이란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견디라, 이기라, 오늘 맞이한 그대의 추위를. 이 밤에 '찹쌀떡 사려'를 외치는 소리가 달려가는 자동차소리에 묻어 들려 온다. 저 젊은이를 불러야겠다. 그리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m)을 선사하고 싶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사랑, 그 위대함이여 고목에 새 순 돋듯 움트는 사랑 고목 나무의 사위어간 가지 끝에 파릇한 새순이 돋는 모습은 그대로 감동이다. 할머니의 손등처럼 턱턱 터 버린 그 고목 나무의 표피를 뚫고, 무엇이 저 연초록 순을 눈뜨게 했을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선인장에서 신비한 꽃이 피어나고 있다. 가시 숭숭 박힌 못생긴 선인장에서 천만 뜻밖에도 피어나는 아, 감동의 꽃. 무엇이 응어리져 저 한 송이의 꽃을 피우는 것일까? 그것은 '사랑'이었다. 통곡처럼 흐르는 '사랑'의 물줄기가 마지막 안간힘으로 터져 나온 결실이었다. 우리가 감동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 어느것 하나라도 '사랑'의 표출 아닌 것이 있던가? 사람에겐 누구나 사랑의 샘이 존재한다. 사랑의 맑은 샘은 끊임없이 흘러나와서 '마음'이란 그릇에 차고 넘친다. 넘친 사랑은 흘러간다. 부모에게로, 친우에게로, 이웃에게로, 인류에게로, 그리고 이 세상에 형상을 가진 모든 것들에게로 사랑은 쉼 없이 흘러간다. 나에게서 나간 사랑의 물줄기는 당신의 가슴을 적신다. 서서히 또는 뜨겁게 당신의 가슴에 파도친다. 이제 당신의 사랑이 나에게 다가온다. 당신의 사랑의 손길은 내 마음을 어루만져 나를 미소짓게 한다. 그리하여 당신과 나 사이에 오고 가는 사랑의 끊임없는 교섭. '행복'이란 말은 바로 이 경우에 적합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고독하다고 호소한다.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푸념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고독이란 무엇인가? 고독이란 사랑의 단절을 뜻한다. 우리 주변에 정겨운 사람은 많으나, 내 사랑은 흐를 곳이 없다. '정겹다'는 것은 다만 관념일 뿐, 부모도, 형제 자매도, 친구도, 다만 관계로서만 존재할 뿐, 사랑을 부어줄 대상이 없다. 사랑의 샘은 쉼 없이 솟아 오르나 그 사랑이 흘러갈 곳이 없다. 그럴 때 사랑은 어찌 되는가? 우리의. 마음을 넘쳐난 사랑은 제 자리에 가득히 고여 썩어갈 수밖에 없다. 사랑의 샘이 썩는 냄새. 그리하여 내 정신은 황폐하게 되고, 내 몸은 시들어 버린다. 온실의 장미꽃은 그 향기가 매혹적이다. 향기, 그것은 바로 장미꽃의 심장에서 뿜어 나오는 사랑의 모습이다. 그 향기는 창문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간다. 그리고 벌과 나비를 감싸고 사랑을 호소한다. 벌과 나비는 황홀하다. 사랑의 손길에 끌려 그들은 장미꽃을 찬미한다. '행복'은 이제 장미의 것이다. 그러나 창문을 모두 닫아 보라. 밀폐된 온실 속에서 장미꽃은 몸부림친다. 가득히 내뿜은 사랑의 향기는 오히려 장미꽃을 파먹고 장미꽃을 질식시켜 죽게 만든다. 우리는 고독하다고 말하기 이전에 누군가를 열심히 사랑해야 한다. 내 옆에 아무도 없다고 말하기 전에, 그런 사람을 찾아가 그의 친구가 되어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내 사랑 듬뿍 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야 하고, 그들의 사랑 또한 듬뿍 내가 받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진정한 '행복'을 찾아야 한다. 상대방의 사랑이 내게 늦게 온다고 탓하지 말라. 사랑은 넘쳐날 때 흐르는 것이다. 그의 사랑의 샘줄기가 풍성할 수 있도록 도와 주라. 그래야 네 가슴 속엔 항상 맑고 신선한 사랑의 샘이 넘쳐 흐르는 것이니라. 자식의 목숨을 지키는 어머니 내 의식의 바탕에 깔려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나는 귀하게 느낀다. 삶의 많은 조각들이 망각의 늪 속에 잠겨들지만, 가슴이 메어지도록 아픈 기억은 지금도 나를 일깨워 열심히 사랑의 샘물을 펌프질하게 한다. 국민 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한다. 우리 집은 한길가에 있었고, 한길에 접한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쪽마루, 거기에 잇대어 낮에도 햇살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방 한 칸이 전부였다. 여름엔 너무 더워서 나는 엄마와 함께 늘 쪽마루에서 잠을 자곤 했다. 무섭고도 슬픈 어느 여름날 밤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그날도 나는 엄마와 함께 자동차 소리 웽웽 들리는 쪽마루에서 잠을 잤다. 세상 모르고 잠 속에 빠졌던 내가 깬 것은 밤 3시쯤 되었을 땐가? 엄마는 계속 나를 흔들어 깨우고 계셨다. 차차 정신이 들면서 내 눈에 들어온 끔찍한 광경. 희미한 빛속에서 내가 확인한 것은 휑하니 터져 나간 대문자리와 마구 부서져 여기저기 널린 나무 조각들, 엄마와 나를 덮치고 있는 문짝이었다. 와락 몰려드는 무서움에 나는 엄마 품에 매달렸고, 엄마의 이마에서 흐르는 것이 피라는 것을 안 것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엄마는 숨을 헉헉 몰아 쉬고 계셨다. 그리고 무어라고 계속 말씀하셨지만, 그 말뜻을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강도가 들어와서 난장판이 난 줄로 알았고, 공포와 두려움으로 마구 울음을 터뜨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한밤중에 미군 트럭이 우리 집을 덮쳐, 트럭의 범버 앞부분에 엄마와 내가 끼어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트럭이 후진하는 바람에 머리맡 선반 위에 놓였던 한 말들이 간장통(혼자서 들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사기통)이 떨어져 엄마의 머리를 다쳤다는 것이다. 트럭은 뺑소니를 쳐 영원히 잡을 수 없었다. 트럭이 집을 덮치는 순간, 엄마는 필사적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 트럭의 범버 앞부분에 엄마는 꼼짝달싹할 수 없이 끼였고, 엄마는 허리를 크게 다치셨다. 더욱이 머리 위로 떨어진 간장통 때문에 부상은 더 컸다. 그러나 그 경황 중에도 엄마의 모든 의식은 나의 생사에만 모아졌었다. 당신의 머리에서 피가 마구 흐르는 것도 모르고 허리에 금이 간 것도 모르는 채, 엄마는 계속 나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나는 깨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순간적으로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셨다. 눈물과 피가 범벅이 되신 채 내 이름을 마구 부르셨다. 내가 태평스런 잠에서 깨어난 것은 한참 뒤였다. 내가 깨어난 뒤에도 엄마는 계속 내가 어디 다치지 않았는가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 소리는 헉헉 몰아쉬는 숨소리에 묻혀 내겐 뜻 모를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나는 털끝 하나 다친 데 없이 말짱했다. 그 밤중에 엄마를 손수레에 실어 병원으로 옮기면서, 텅 빈 거리가 그대로 악마의 손길로 화하여 내 몸을 감싸는 공포에 나는 계속 울었던 기억이 난다. 무슨 힘이 어머니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나를 완벽하게 감싸 안도록 했을까? 무슨 힘이 어머니로 하여금 그 크나큰 부상으로 죽음 속을 헤매면서도 나를 부르게 했을까? 나이가 이렇게 먹어서야 나는 깨닫는다. 그것은 어머니가 가지신 '사랑' 주어도 다함이 없는 어머니의 '사랑'이 당신은 허리가 꺾어지고 머리가 터지는 고통을 당하셨어도 자식놈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보호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1년이 넘어서야 겨우 거동하셨지만, 평생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셨다. 신께 빌어 자식을 지키려는 어머니의 크나큰 사랑 우리 때의 젊은이가 대부분 그랬듯이 나의 대학 생활도 시련의 연속이었다. 학비를 스스로 충당해야 하는 것은 물론, 홀어머니를 모시고 생활마저 꾸려가야 하는 생활인 노릇도 해야 했다. 실로 악전고투, 생존의 방식이 이래야만 하는가 하는 회의 속에 죽음을 생각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개구리도 펄쩍 뛰려면 잔뜩 움츠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용케도 하루하루를 버텨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연속된 삶의 긴장과 고통은 내 몸을 서서히 좀먹어 갔고, 대학 4년 때 드디어 죽음의 그림자는 내 전신을 덮어 눌렀다. 온 밤을 신열 속에서 헛소리를 지르다가 겨우 아침에 눈을 뜨면 온 몸의 기운이 모두 빠져 버리는 탈진 상태를 느끼곤 했다. 그러나 학교는 가야만 했다. 내가 왜 이 처절한 고생을 하는가? 그것은 오직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학교 수업을 2교시쯤 마칠 때면 어김 없이 오한과 신열이 엄습해 왔고, 그 고통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불광동 단칸방에 돌아오면 나는 축 늘어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녁이면 나는 어김없이 아이들을 가르쳐야 했다. 그것이 바로 내 생활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허탈과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밤이면 나는 온 몸을 떨며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몸살 감기려니 하고 애꿎은 알약만 입에 털어 넣고 있었다. 그렇게 1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선뜻한 기분에 눈을 떴다. 내 머리맡에는 깨어진 쪽박에 죽이 담겨 있었고, 그 쪽박을 가로질러 부엌칼이 얹혀져 있었다. 어머니께서 밤마다 열에 들떠 헛소리하는 아들이 안타까워 귀신풀이하신다고 그런 예방을 쓰신 것이었다. 나는 머리끝이 쭈빗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 쪽박을 발길로 차 버렸다. 그리고 와삭 밟아 버렸다. 내 행동은 짐승처럼 난폭했다. 그 때 슬프게 나를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눈망울, 그 눈망울을 나는 지금도 아프게 기억한다. 혼자 생활을 꾸리며 학교 다니는 아들이 얼마나 애처로우셨을까? 살림을 돕는다고 당신께서도 산나물을 캐다가 시장에 내다 팔고는 하셨지만, 당신의 온전한 힘으로 아들을 키우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어머니는 얼마나 가슴을 치셨을까? 이제 아들은 사경을 헤매는데 주머니 돈조차 없으신 어머니가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진하디 진한 정성을 모아 신께 열심히 비는 것 이외엔 없었으리라. 그리하여 내 머리맡에 귀신풀이 죽을 쑤어 놓으신 것 아닌가? 그 행위는 어머니가 내게 베푸실 수 있는 최후의 사랑인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찌했던가? 어머니의 정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의 기원이 담긴 그 쪽박을 마구 짓밟아 버린 것이었다. 아, 그런 나를 보며 어머니는 얼마나 슬프셨을까? 생과 사의 갈림길에 부어진 사랑의 손길 보름이 지나도 내 병세엔 차도가 없었고 오히려 더욱 심해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내 목숨을 구한 건 나에게 애정을 부어 주던 명아였다. 명아는 내가 고통스러워할 때 항상 내 곁에 있어 주었다. 고교 시절, 방황하던 어둠의 끝에 한 줄기 빛을 준 것도 명아였고, 대학 입시의 뼈를 깎는 고통을 어루만져 준 것도 명아였다. 그녀가 나를 발견했을 땐, 나는 이미 학교도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 그녀는 신속했다. 무조건 나를 백병원으로 끌고 갔다. 내 입장으로는 병원의 문턱이 너무 높아 엄두도 못 냈는데, 그녀는 씩씩했다. 원장의 특진을 받을 때도 나의 의식은 가물거렸다. 진찰 후, 진찰실 문 밖의 의자에 누워 있는 내 귀에 아련히 들려 오는 울음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차차 통곡으로 변하여 나를 오열하게 만들었다. 명아였다. 원장에게 가망없다는 최후 통첩을 받고는 명아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엉엉 울고 있었다. 나는 즉시 입원되었다. 가망 없다는 판단이었으나 명아의 강청으로 입원시킨 것이리라. 나는 난생 처음 입원을 하는 호강을 누렸지만, 어머니가 걱정되었고 가르치는 아이들도 걱정되었다. 장기간 쉬게 되면 내 밥줄이 끊어진다는 치사한 생각에 나는 안절부절 못했다. 같은 과 친구를 불러 나 없는 동안 아이들을 잘 가르쳐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서울 지리도 잘 모르시는 어머니에게는 친구 뒷바라지를 잘 해 주시라고 부탁드리고, 드디어 나는 인사불성이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나는 급성 황달병에 걸려 있었고 게다가 간경화증의 증세를 띠고 있었다고 했다. 마구 터져 나오는 끝없는 기침, 정신을 잃도록 만드는 고열, 눈빛깔도, 얼굴 색깔도 완전 노랑이었고, 오줌 색깔은 피빛으로 녹슨 쇠빛을 띄었었다. 나는 인사불성이 되어 삼 일이나 죽음 언저리를 헤맸다. 병원에서는 퇴원을 종용했다.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아, 그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나를 어루만져 준 사랑의 손길들. 나는 '사랑'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서울 대학 병원으로 떠메어져 가야 했다.(대학의 어른들께서 힘써 주신 덕으로 대학 병원으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20여 일을 투병했다. 그 때 나를 간호해 주었던 처녀들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명아는 친구들에게 호소했고, 평소에 나와 안면이 있던 친구 셋이 자원 봉사자로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네 명의 처녀는 하루를 4교대하여 나를 간호해 주었다. 간호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꼼짝 못하는 중환자였으므로, 모든 시중을 그녀들이 해 주어야 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대소변을 가리는 것조차도 그녀들은 정성스럽게 시중들어 주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녀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녀들의 20여 일간의 정성스런 간호로 소생할 수 있었다. 리버 실리시스 나는 병명과 함께 지금도 그녀들의 사랑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싱그러운 젊음을 가꾸는 사랑의 샘물 '행복' 사랑은 사람을 소생시킨다. 사랑은 상처를 아물게 해 주고 기쁨을 선사해 준다. 당신의 몸으로 내 목숨을 지켜 주신 어머니, 가난한 한 젊은이를 살리겠다고 교대로 나를 간호해 준 네 명의 처녀들, 나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월급 모두를 내 병원비에 쓰도록 했던 친우 어찌 그뿐이랴. 내 삶을 영위해 오는 동안 나에게 사랑을 심어 주고 은연중 삶의 방향을 가르쳐 준 많은 사람들. 아, 감사한다. 사랑의 위대함을 일깨워 준 그분들께 감사한다. 이렇게 나이 먹어서야 그 고귀함을 겨우 깨달았는데, 그분들은 이제 내 곁에 없다. 그분들이 부어주신 사랑은 지금도 내 가슴에 넉넉하게 흐르는데, 정작 사랑을 사랑으로 보답 받으셔야 할 그 분들은 없는 것이다. 우리 시대를 사는 젊은이여, 우리는 '꽃'이 되기를 원한다. 무의미한 몸짓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해 받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눈짓'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려면 사랑의 눈빛으로 네 주변을 돌아 보라. 네가 '꽃'이 되기 위해선 먼저 남을 네 '꽃'으로 맞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사랑하라, 눈부신 이 4월에, 젊은이여, 네 가슴을 타고 흐르는 사랑의 샘물로 흠씬 네 주변을 적시려무나. 그리하여 우리 모두 고목에 싹트는 새 움의 감격으로 우리의 싱그러운 젊은 시절을 가꾸어 보자꾸나. 그것이 곧 나의 '행복'인 것을. 너희들 세대의 목표 아무도 말하려 들지 않는 6.25의 상흔 44년 전 6월의 그 공포를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어린 가슴에 커다랗게 찍혀진 상혼. 그것은 개인에게나 민족에게나 영원히 씻겨질 수 없는 아픔으로 아직도 존재한다. 6.25의 비극 그것은 잊혀져 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슴속에 앙금처럼 더욱 깊이 새겨지는 것이다. 전쟁의 상처는 너무도 참혹한 것이어서 누구도 차마 그 때의 그 비참함을 말하려 들지 않을 따름이다. 이제 내가 겪은 전쟁의 모습을 젊은이들에게 추상적으로나마 들려주려는 것은, 아직도 평화의 시기가 먼 우리는 반세기 동안 이데올로기의 대결 속에 수많은 희생을 치러 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나라 현실을 직시하고, 젊은 세대의 올바른 목표 설정에 조금이나마 조언할 수 있을까 하는 심정에서이다. 역사의 흐름은 세대마다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시간에서 잉태된 '현재'가 곧 '미래'로 연결되는 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국민 학교에 갓 입학한 나에겐 학교 생활의 하루하루가 흥분과 기쁨의 연속 그것이었다. 새순에 물오르듯 매일매일이 싱그러웠던 나날들. 그러나 그 기쁨을 어느 날 몰아친 한 순간의 공포로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점심 시간의 운동장은 아이들의 들뜬 목소리와 즐거운 몸놀림으로 꽉 차 있었다. 고무줄넘기하는 아이, 철봉대에 매달린 아이, 술래에게 쫓겨 뱅글뱅글 맴도는 아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소리에 한 발짝 도둑 걸음을 옮기는 아이. 조무래기들의 즐거움이 한껏 운동장에 펼쳐졌던 그 날의 점심 시간. 그 때였다. 비행기의 광음이 온통 운동장을 뒤덮은 것은. 곧 이어 도시를 향한 비행기의 기총 소사가 우리의 고막을 찢었고, 일시에 운동장은 수라장으로 변했다. 아이들의 울부짖음 속에 나도 운동장 한 구석에 내동댕이쳐졌고, 엄마를 부르며 나는 온몸을 떨고 흐느꼈었다. 그 시간으로 우리는 집으로 보내졌고, 그것이 내가 겪은 전쟁의 서막이었다. 44년 전, 내 국민 학교 일 학년 때 체험한 그 날 그 순간의 일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지금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 때의 기억에 나는 귀를 막는다. 나중에 들은 소식으로는 그 때 그 기총 소사에 5, 6학년 상급생이 둘이나 다쳤다고 한다. 불길에 싸인 고향을 등지고 두려움에 울며 피난길에 거리는 이미 우왕좌왕하는 사람들로 어지러웠고, 무엇인가 알리는 스피커의 깨진 소리는 공포를 더욱 가중시켰다. 엄마를 부르며 집으로 뛰어가던 나의 작은 모습... 엄마는 나를 달래 놓고 집을 나섰고, 누이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덜덜덜 떨면서 유리창 너머 어두워지는 회색빛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별안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창 밖이 훤해졌다. 그것은 하늘로 마구 치솟는 불길이었다. 우리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경찰서가 화염에 싸여 불타고 있었고, 그 불길 속에 총소리가 간단없이 울려오고 있었다. 누이와 나는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며 얼마나 무서워 울었던가? 그 밤으로 우리는 피난길에 올랐다. "헤어지면 죽는다. 절대로 떨어져선 안 된다. 만약 헤어지게 되면 이 주소로 찾아와야 한다." 아버지는 주소를 적은 쪽지와 얼마간의 돈을 누이와 나의 몸에 숨겨 주셨다. 피난짐이 실린 손수레에 나도 짐짝처럼 실렸고, 아버지는 끌고 어머니와 누나는 밀고, 우리는 거리를 메운 피난 행렬에 섞여 화광이 충천한 고향을 떠나고 있었다. 나는 너무도 무서워 울음조차 토하지 못했다. 그 전쟁의 공포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굶주림과 눈물로 얼룩졌던 정처 없는 피난살이 트로이의 목마가 등장하는 영웅들의 전쟁은 대서사일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겪은 전쟁은 생사가 엇갈리는 처절한 삶의 극한 상황이었다. 피난길에 마주했던 주검, 주검들. 지금도 국민 학교 일 학년 때 목격한 그 처참한 주검들의 모습이 나를 몸서리치게 한다. 공산군의 점령지가 되어 버린 피난지에서의 생활은 처참을 극한 것이었다. 그 때의 굶주림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침 저녁, 엄격하게 하루 두 끼 배급되던 멀건 호박죽은 이름이 죽이지 물과 다를 바 없었다. 숟가락조차 사용할 필요가 없는 그 죽은 훌훌 마시는 데 5초도 안 걸렸다. 슬픈 눈동자를 굴리면, 아버지 어머니는 내 죽그릇에 당신의 것을 덜어 주셨고, 나는 염치없이 그것마저 싹싹 핥아 먹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인민군에게 강제로 끌려 가셨을 때, 어머니는 우리 남매를 안으시고 밤을 새워 피눈물을 쏟으셨고, 도깨비보다 더 무서운 빨갱이를 저주하며 동구 밖 느티나무 위에 올라가 하염없이 아버지를 기다리며 눈물짓던 그 아픈 날들을 나는 가졌었다. 유엔군의 폭격을 틈 타 아버지는 천행으로 도망쳐 오셨고, 그 밤으로 우리는 또 정처 없는 피난길을 떠나야 했다. 피난길에 지쳐서 죽어도 집에 가서 죽자고 우리는 고향으로 되돌아왔고, 탈진 상태로 찾아든 고향에서 인민군의 요란한 행진을 보면서 어린 나의 가슴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죽음의 그림자에 휩싸인 얼어붙은 어린 새가슴 전쟁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1.4후퇴. 그 겨울은 왜 그리도 추웠던지.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길게 이어졌던 피난민의 행렬. 피난길에서 무차별 폭격을 만났을 때 죽고 산다는 의식은 이미 없었다. 하얀 눈 위에 선명하게 번진 선혈, 눈은 내게 있어서 지금껏 죽음의 인상으로 남아 있다. 안전하게 피난을 간다고 겨우겨우 외가집에 당도했지만, 외삼촌을 잃은 외가는 죽음의 그림자만이 짙게 드리워 있었고, 슬픔에 울부짖던 외할머니는 나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어느 날 그 무서운 비행기의 폭격이 우리 마을을 휩쓸었다. 쌕쌕이라고 불렸던 미군 전투기가 갑자기 시골 마을을 엄습하여 우리 집 바로 앞집에 폭탄을 던졌다. 이불을 겹겹이 덮고 이불 속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며 죽음만을 기다리던 그 숨막히던 공포의 시간. 인민군에게 밥을 해 준다는 범길네 집은 불길에 휩싸였고, 인민군들이 쏘아대는 따콩 총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지붕 위에서 하얀 눈을 뭉쳐 불길 속에 던지던 범길이 아버지는 끝내 그 불길 속에 몸을 던졌다. 여기저기 시신을 들어내는 집집마다의 통곡이 마을 뒤 천마산을 흔들었고, 얼어붙은 새가슴으로 나는 눈물도 잊었었다. 참담했던 전쟁의 상처를 극복한 우리의 잠재력은 고향으로의 복귀는 참으로 가슴 떨리는 감격이었다. 전선은 일진일퇴로 교착 상태였지만, 이젠 전쟁이 끝났다고 어서 돌아가야 한다고 찾아 온 고향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을 무엇이었던가? 우리 집 부근은 모두 잿더미로 변했고, 어디가 우리 집터인지 구별도 할 수 없는 폐허 속에서 어머니는 넋을 잃고 울고 또 우셨다. 그 뒤로 내 집을 마련하는 데 20년도 더 걸렸다.(그것은 내 대에 와서 실현되었다.) 다시 다니기 시작한 학교는 이미 예전의 학교가 아니었다. 끝내 나타나지 않은, 눈이 예쁜 계집아이인 내 짝의 소식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전쟁통에 얻은 신병으로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하셨고, 생존을 위한 안간힘 속에 온 가족은 각자 생활 전선에 매달려야만 했다. 아직도 생생히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 때의 일들, 무엇이 아득한 어렸을 때의 일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게 하는 걸까? 한강을 가르는 유람선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석양에 번쩍이는 황금빛 63빌딩, 숲을 이룬 아파트촌에 태양은 타원형으로 붉게 타오르며 사위어간다. 아름다운 이 땅에 과연 전쟁은 있었는가? 하늘을 찌를 듯한 위용을 자랑하는 저 도시의 빌딩들이 과연 잿더미 위에 세워진 피땀의 결과인가? 풍요로운 시대를 여는 젊은이여, 동서남북을 관통하는 이 땅의 동맥 고속 도로가,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철강 산업이, 세계로 수출되는 우리의 자동차가, 88년에 열린 서울 올림픽이 그냥 주어진 하늘의 축복인가? 물론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50년대의 폐허 속에 눈물을 삼키며 허리를 졸라매었던 우리 부모들, 선배들의 재건 의지의 결실임을 우리는 안다. 전후의 극심한 혼란을 그들은 지혜롭게 견뎌냈다. 민족의 가슴 깊이 깔려 있는 잠재력은 다시 한 번 활화산으로 타올라, 50년대를 견디고 60년대를 이겨냈다. 그리하여 웅비를 꿈꾸는 70년대, 80년대의 의지가 이제 꽃을 피우려 하는 시기를 맞이하지 않았는가? 각 세대에는 각 세대의 민족적 목표가 있다. 20세기 그 여명부터 이제까지의 우리 민족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알 수 있으리라. 얼마나 피맺힌 역사의 한 장인가를. 우리 젊은 세대들의 목표는 민족의 통일로 모아져야 일제 저항기(1950__1945)에 우리 할아버지 세대가 이루려 한 목표는 무엇이었던가? 안창호 선생이, 김 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가, 이봉창 의사가, 유관순 누나가, 이름 모를 수많은 광복군이, 아니 저자거리에서 평범하게 살다 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한결같이 추구한 민족의 목표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자주 독립', 오직 그것뿐이었으리라. 후손에게 치욕의 역사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 악랄한 일제에 항거하고 항거했던 그분들의 처절한 투쟁. 그리하여 우리는 광복을 쟁취했고 자주 독립 국가의 건설에 매진했던 것 아니던가? 그러나 이념의 전쟁터로 화한 이 땅은 민족 상잔의 비극 속에 150만 명의 사상자와 1,000만 이산 가족의 아픔을 남기는 전대 미문의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그 전쟁은 우리 아버지 세대의 몫이 되었고, 남복 분단의 쓰라린 현실 속에서 우리 아버지 세대는 속죄하듯 재건, 재건의 의지를 숨가쁘게 불살라 왔다. 격동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도 민족의 안정을 위한 슬기를 모아 선진 조국의 기틀을 다져온 아버지 세대, 그리고 그분들의 소망인 민족 통일의 염원은 아직도 요원한 채 이제 젊은이 세대로 옮겨져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 분단의 정체성은 이제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북한 핵문제로 세계가 들끓더니 남북 정상 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이 갑자기 죽었다. 드디어 6.25를 일으킨 원흉도 덧없이 가고 그 세대의 증오의 이야기도 전설이 되려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젊은이여, 너희가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너희의 목표는 무엇인가? 각자의 삶의 형태는 달라도 너희의 이 시대 목표, 너희들 세대의 목표는 오롯하게 모아져 하나이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민족의 통일이다. 아버지 세대에 이루지 못한 그 지난한 민족의 목표를 너희 세대엔 반드시 이룩해야 한다. 자유 민주주의의 확고한 기치 아래, 공산 압제에 시달리는 내 피붙이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너희는 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오천 년 민족사를 다시 하나로 잇는 이 민족의 절대절명의 지상 과제인 것이다. 평화 통일의 그 날은 이 민족이 새로 태어나는 날 자유와 평화와 평들을 남북 강토 칠천만 동포가 함께 누릴 수 있는 날, 그 날이 바고 이 민족이 새로 태어나는 날이고, 그 날이 바로 민족사의 대화합이 이루어지는 날이다. 이 커다란 너희들 세대의 목표가 어찌 순탄히 이루어지랴. 넘고 넘어야 할 험난한 고비를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아버지 세대가 그런 것처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다음 세대에게 떳떳한 선배가 되기 위해 너희 세대의 이 지난한 목표를 이루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이 따뜻한 남쪽 땅에 자유와 평화와 평등을 진정으로 실현시켜야 한다. 또한, 북쪽을 압도하는 우리의 문화적, 과학적, 경제적 슬기를 세계에 드러내야 한다. 젊은이여, 우리는 왜 공부하는가? 해답은 자명한 것이다. 어떠한 분야에서 각자의 자아 실현을 위해 노력할지라도 종국엔 너희 세대의 이 궁극적 목표를 향해 너희의 마음과 뜻은 하나로 뭉쳐져야 한다. 현충일날, 우리 함께 이름 없는 용사의 무덤에 한 송이 꽃을 바치자. 그리고 가신 분의 숨결을 우리 가슴에 묻어보자. 그분들이 무엇을 염원하며 쓰러져 갔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 알리라, 왜 우리가 민족 통일을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가를. 우리 몫으로 지녀야 할 시대 정신 역사 의식 속에 숨쉬는 우리 "너희는 공부나 해." "학생이 다른 일에 신경 쓰면 못 써." 학생이라는 제약 때문에 젊은이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서 소외되곤 한다. 역사는 험난하게 소용돌이쳐 흘러가는데, 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젊은이는 단순한 방관자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물론 학업을 성취하기에도 바쁜 젊은이들에게 현실 참여를 운운하는 것은 무리이며, 내일을 준비하는 미성년자이기에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학생이기 이전에 대한 민국의 한 구성원이며, 한 시대를 책임지고 살아갈 뜨거운 가슴을 지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역사적 현실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들은 21세기를 이제 5년 여 남겨 놓은 현 시점에 살고 있다. 인간성이 급속도로 말살되어가고 있다는 한탄 속에 이 시대를 산다. 그리고 전세계적인 이데올로기의 냉전은 종식되었으나 아직도 남북한 비극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지속되고 있는 이 숨막히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한국 사람이다. 오천 년 배달 민족의 전통과 생활 양식, 언어와 사고 방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한국인이다. 그리고 내가 숨쉬고 살아가는 이 땅, 수탈의 치욕적 역사 끝에 미, 소 열강의 힘에 의해 겨우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던 이 땅, 이 땅이 바로 내 삶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터전이요 형식이다. 이 땅을 벗어나서 배달 민족의 역사가 존재할 수 없고, 한국의 국호가 사용될 수 없다. X축이 우리의 삶을 규정 짓는 형식이라 하면, Y축은 우리의 정신적 주소가 되는 내용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한 X축, Y축의 좌표 속에 우리는 현실을 고민하며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찌 학생이라고 해서 그 좌표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고등 학교 때 체험한 4.19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이 일어났다. 광복 이후 6.25를 겪으면서 간신히 유지되어 가던 정권이 혁명에 의해 전복되는 불행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 때는 내 고등 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자유당 정권의 전횡은 극에 달했고, 드디어 그 해 정. 부통령 선거는 부정 선거로 얼룩져 버리고 말았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의 급격한 서거로 이승만 박사의 당선은 확정된 것이었으나, 부통령 선거는 달랐다. 상대적으로 인기가 높아진 민주당 장 면 후보를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가 이겨낼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3.15 선거의 결과는 이기붕의 압도적인 당선으로 나타났고, 그 결과를 보고 전 국민은 분노했다. 자유당 말기의 혹독한 통제 정치를 견디지 못한 국민들은 드디어 봇물 터지듯 들고 일어섰다. 그 기점은 마산이었다. 마산에서 처음으로 3.15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터졌고, 그 며칠 뒤 전국민을 경악시키는 한 장의 처참한 사진이 각 신문 1면 톱기사로 실렸다. 왼쪽 눈에 프로펠러식 최루탄이 무참하게 박혀서 부패된 시신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학생의 사진. 그것은 고등 학생 김주열 군의 시체였다. 그는 데모 당일 행방불명되었었다. 그 처참한 사진을 보고 온 국민은 치를 떨었다. 이제는 견딜 수 없었다. 그 분노의 목소리가, 규탄의 목소리가 서울뿐만 아니라 시골 장터에까지, 노인에서 국민 학생까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3.15 부정 선거 무효다." "이승만 박사는 대통령직에서 하야하라." 격렬한 데모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었고, 경찰의 발포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며, 종국에는 이승만 박사의 대통령직 하야로 자유당 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고등 학교 학생회 간부들이 각 학급을 돌며 우리들을 운동장으로 모이게 했다. 우리들은 모두 흥분해서 너나할것없이 한꺼번에 복도로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반장직을 맡고 있던 나 또한 치솟는 분노 속에 강렬하게 행동했던 것 같다. 물리 선생님께서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내 따귀를 강하게 후려쳤다. "무슨 짓인가? 학생이 공부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대체 무엇 하는 짓인가? 데모라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눈물이 쑥 나왔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외쳤다. "선생님, 불의를 보았을 때 참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 분이 누구입니까? 저 처참한 김주열 군의 죽음을 보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입니까?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비열한 인간이 되라는 말씀입니까?" 나는 부르짖으며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우리들은 스크럼을 짜고서 만류하는 선생님들을 뿌리치고 교문 밖으로 물밀듯이 밀려 나갔다. 그 때였다. 경찰의 곤봉이 하늘에서 춤을 추었고, 우리는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도랑 속으로 처박혔다. 경찰의 경비는 삼엄했고, 백차 위에는 기관총이 걸려 있어 총부리가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 날로 학교는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뿔뿔이 흩어진 우리들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시내 이곳 저곳에 모여 데모를 했다. 격렬한 데모를 했다. 드디어 무수한 희생 끝에 4.19 혁명은 승리했다. 그러나 학생이 주동이 되어 이룩한 혁명은 정권을 바꾸어 놓는 선에서 그치고 말았다. 우리는 다시 학교로 복귀했고, 학교로 복귀했을 때 우리의 의식은 성큼 자라나 있었다. 국운의 마지막 위기에는 학생이라고 해서 방관자의 입장에 처할 수만은 없다는 진리를 우리는 깨우쳤다. 그리고 젊음의 순수한 열정은 정의 수호의 보루가 된다는 진리도 깨우쳤다. 대학 시절에 겪었던 6.3 데모의 상처 한국의 불안한 정치 상황은 민주당 정권도 오래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을 비롯한 일단의 군인들에 의해 군사 쿠데타가 터졌다. 그리고 제3 공화국, 유신 시대를 거쳐 80년대 말까지 이어지는 군사 통치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자유당 민주당 통치의 난맥상을 겪은 국민들은 군사 쿠데타를 당하면서 오히려 침묵하고 있었다. 어쩌면 군사 쿠데타라도 일어나 이 나라의 행로를 바로잡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이 탄생되었고, 정치적 상황은 대단히 불안정 했다. 우리는 다만 회색빛 가슴을 쥐어뜯으며 침잠할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다. 1946년 내가 대학교 1학년 신출나기 생활에서 때를 벗어가고 있을 때, 군사 정부 하에서의 6.3 데모가 격렬히 터졌다. 박 대통령은 한일 회담 성사를 위해 열심이었고, 한일 현안 문제 타결과 더불어 경제적으로 일본의 도움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6.3 사태라 불리는 그 당시의 데모는 한일 회담 굴욕 외교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격렬한 데모 사태였다. 연일 데모대가 거리를 메웠고, 피끓는 청년들은 사자후를 토하며 일제 강탈 36년간의 그 치욕이 단돈 몇 푼으로 씻겨질 수 없음을 강렬하게 외쳤다. 박정권의 탄압은 혹독했다. 도서관에 앉아서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이 오히려 친우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졌던 그 때, 책가방을 옆에 끼고 광화문으로 세종로로 데모대에 끼여 외치고 외쳤던 그 시절. 대학은 다시 휴교를 맞았고, 학우들은 뿔뿔이 흩어져 갔다. 어느 친구는 교도소로 끌려 갔고, 어느 친구는 자진 입대의 길을 밟았다. 나 또한 그 시대가 던져 주는 절망감을 못 이겨 군대에 나가리라는 핑계 속에 휴학을 하고 말았다. 시대를 네 품에 품어라 역사의 현장에서 핍박 받은 수많은 사람들. 역사의 현장에서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 시대의 민주화는 이렇게 앞당겨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분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내 삶이 부끄럽게 여겨진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적인 전개일 것이다. 인간의 삶과 갈등 속에서 터져나오는 사건들, 각 사건의 발발, 진행, 결과 속에는 반드시 인간의 의지가 작용할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의 필연적인 전개에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시대를 이끌어 가는 치열한 시대 정신일 것이다. 우리의 젊음은 환경에 상처받기 쉽고, 시대에 상처받기 쉽다. 우리의 젊음은 미완성의 시간 속에서 성숙을 위한 많은 아픔을 견뎌내야 한다. 그러면서 그 시대를 숨쉬며 살아가야 하는 치열한 시대 정신을 연마해야 하리라. 이제 곧 21세기가 펼쳐진다. 분단 조국은 통일의 필연적인 역사를 가질 수밖에 없다. 어떠한 정치 체제를 가지든 남북한 칠천만 동포가 한 국가 체제 안에 살아가는 시대를 창출하게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구촌은 더욱 좁아져 전세계는 하나로 어우러지는 세계화, 개방화의 흐름이 점차 빠르게 요구되는 그런 시대가 될 것이다. 이 땅의 젊은이여, 너희들의 어버이 시대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투쟁의 세월에 경의를 표하라. 그 시대는 네 어버이의 시대 정신이 치열하게 꽃 피었던 삶의 시기인 것이다. 젊은이여, 이제 너희들의 새로운 시대가 펼쳐진다. 그 새로운 시대는 단순히 꿈과 희망만이 존재하는 그런 시대는 아닐 것이다. 어느 시대나 그랬듯이 너희들이 건설하는 시대도 많은 고통과 희생을 요구하는 그런 시대일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여, 두려워 말라. 그 시대를 바로잡아야 하는 사명감도 너희 것이요, 그 시대 속에서 번영을 이루어야 하는 의무감도 너희의 것이며, 그 시대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꽃 필 수 있도록 투쟁하는 것도 너희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세월을 흘리지 말라. 흐르는 시간을 네 품에 끌어안고 치열한 시대 정신 속에서 내일의 꿈을 펼쳐 가는 자랑스런 이 땅의 젊은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난은 우리를 유익하게 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젊어서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 산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는, 젊어서 굳이 금을 주면서까지 고생을 일부러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생이라고 하는 것은 처절한 것이며, 자칫 고생이라고 하는 파도에 떠밀려 인생을 파멸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의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 산다는 말, 그 말은 아마도 그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고통을 능히 견디고, 그 고통을 거울 삼아 앞으로의 삶의 설계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능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젊은 시절의 고생은 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젊었을 때에는 되도록 고생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 고생 속에서 상처받기 쉬우니까. 그러나 젊은 시절에 운명처럼 몰려오는 시커먼 폭풍우가 너를 덮친다면, 굳이 피하지 말라. 오히려 그 폭풍우를 끌어 안고 고통의 아픔이 어떠한 색깔인지 잘 살펴보라. 그리고 견뎌 내라. 세월이 흘러 그 시커먼 폭풍우가 저만큼 물러간 뒤에 우리는 스스로를 추스리며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 한 때의 고통, 그것은 나를 성장시켰다." 시커먼 폭풍우에 갇혀서 나와 같은 연령의 세대들, 그들은 대부분 시대가 주는 고통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내 고생이 심하다고 하지만, 아마 우리 세대가 겪은 고통에 조금 덧칠한 것에 불과한 것이리라. 고등 학교 1학년 말, 갑자기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편찮으신 어머님은 큰누이 집에 의탁하게 되었고, 나는 당분간 사촌 형님 댁에서 기거하게 됐다. 사촌 형님이라고 하지만 그분의 연세는 나하고는 35세쯤 차이가 났고, 나에게 조카가 되는 그분의 아들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사촌 형님 내외분은 대단히 선량하신 분들이었다. 토담집 단칸방에서 두 양주와 5남 1녀가 함께 살아가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눈살 찌푸리지 않으시고 나를 받아주셨다. 밤이면 잠자리가 마땅할 리 없었다. 나를 포함한 아홉 식구가 토담집 단칸방에서 한데 엉켜서 잠을 잤다. 나는 학교에서 늦게 귀가할 수밖에 없었다. 반가이 맞아 줄 사람 아무도 없는 곳에 그저 잠이나 자러 들어간다는 기분이었으니까. 밤늦게 집에 들어서면 이리저리 빼곡하게 누워서 자고 있는 모습들, 내 자리는 없었다. 한 구석에 처량하게 서 있으면 아버지 같은 형님이 말씀하셨다. "어서 게 누워 보렴." 잠자리와 끼니는 어떻게 해결되었다고 하지만,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스스로 학비도 벌고 용돈도 벌겠다고 나섰다. 처음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신문팔이였다. 신문을 팔러 다니는 같은 반 친구에게 부탁해서 그를 따라 나섰다. 그 당시에는, 오후에 그 이튿날 조간 신문이 나왔었다. 신문팔이 소년들이 신문을 한 뭉치씩 옆에 끼고 "내일 아침 00신문!" 하고 외치며 달리던 시절이었다. 나도 신문 한 뭉치를 옆에 끼었다. 그리고 내달렸다. 아무 말도 않고 그저 달렸다. 한참을 달렸더니 그 친구가 나를 불러 세우고 말했다. "너, 나만 쫓아오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너 갈 데로 가 봐. 너 그렇게 하다가는 신문 한 장도 못 판다. 나 쫓아오지 마." 휑하니 제 갈 길로 가 버리는 그를 야속하게 바라보며 나는 막막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다잡아 먹고 발길 닿는 대로 뛰며 외쳤다. "내일 아침 00신문!" 외치기도 잘 외쳤다. 그 저녁 늦도록 다니면서 나는 석 장의 신문을 팔았다. 그리고 한 장은 원가로 더 팔았고, 나머지는 그냥 들고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 이후 신문팔이는 매우 익숙한 나의 아르바이트가 되었다. 찹쌀떡 사려 추운 겨울이었다. 찹쌀떡 장사가 괜찮다고 해서 나는 용기를 냈다. 도매집에 가서 내가 만든 라면 상자 같은 통에 찹쌀떡을 받았다. 찹쌀떡통을 어깨에 둘러 메고, 운동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나는 찬바람 쌩쌩 부는 메마른 도시의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찹쌀떡 사려"하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한참 동안 밤거리의 뒷골목을 벙어리처럼 헤매다가, 나는 나 스스로를 책망하고 경멸했다. "찹쌀떡 사려"하는 그 말 한 마디가 그렇게 하기 부끄러운 것인가? 네 힘으로 돈을 벌어 생활을 꾸려 나간다는 것은 오히려 떳떳한 일이다. 학생이라고 부끄러워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살을 에는 추위, 그랬다. 매서운 바람은 마구 불어와 이마와 뺨을 때렸다. 그것은 마치 살을 쩍쩍 갈라 놓을 듯한 날카로운 바람결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전신주 밑에서 마음을 도사려 먹고 드디어 나는 소리내어 외쳤다. "찹쌀떡 사려." 그 순간 어깨끈이 "툭!" 소리를 내며 끊어지더니 동시에 찹쌀떡을 담은 상자가 거꾸로 땅에 처박혔다. 나는 얼른 그 상자를 들었다. 와르르하고 언 땅에 내동댕이쳐지는 찹쌀떡,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흙에 처박힌 허연 찹쌀떡을 바라보면서,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찹쌀떡을 들어 흙을 털어냈다. 그리고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만큼 얼어붙은 입으로 한 입 베어 물어 보았다. 저걱저걱 흙이 씹혔다. 말랑말랑한 찹쌀떡 속으로 이미 깊숙히 박혀 버린 흙은 털어질 리 없었다. 흙투성이가 된 찹쌀떡을 주섬주섬 주워 담으며 왈칵 쏟아지던 서러운 눈물. 도매집으로 되돌아온 나는 외상으로 찹쌀떡을 새로 받았다. 그 밤에 나는 목이 터져라고 외치고 외쳤다. "찹쌀떡 사려. 찹쌀떡 사려."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도 한겨울이면 찹쌀떡 장수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린다. 나는 그 소리에 향수를 느낀다. 그들을 불러 찹쌀떡도 사고 메밀묵도 산다. 만약 저 찹쌀떡 장수가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이라면, 그들은 인생을 실습하는 중일 것이다. 찹쌀떡 장사를 통해서 삶이 아픔도 살 수 없는 체험을 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자위를 해본다. 죽음을 생각했던 젊은 시절 고등 학교 시절, 그리고 대학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방황하던 시절, 나는 참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산판에 다니며 산자락을 파헤치는 막노동도 해 보았고, 쓰레기더미에서 고철을 캐내는 힘든 노동도 해 보았다. 내 연약한 손으로 노동의 크나큰 신고를 견디어 내기가 얼마나 힘들었던가? 지금도 내가 땀의 귀함을 체험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가정 교사 아르바이트 자리가 정착되면서 내 생활도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지만, 자존심을 지켜가며 생활하기는 역시 힘들었었다. 입주 가정 교사를 할 때, 어쩌다 학교에서 늦게 되면 차마 저녁밥을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미 불규칙한 식사로 얻은 병 때문에, 저녁밥을 먹지 못한 밤에는 위가 쓰라려 잠들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마당에 나가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꾸역꾸역 수도물을 받아먹고는 했다. 한참 먹고 나면 위의 쓰라림이 멈추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젊은 시절 그 때는 당장 한 끼의 식사, 하루의 잠자리를 해결하기 힘들었던 시절, 죽음이라는 것을 많이도 생각했던 암울한 시절이기도 했다. 남산에 올라가 불빛 찬란한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지만 어느 곳에도 내 한 몸 쉴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차라리 땅이 쩍 갈라지지나 않나? 그 곳으로 내가 빨려 들어가 버리고 땅이 다시 닫혀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기를 나는 소망하곤 했다. 바다에 나아가 끝없이 부서지는 해조음을 들으며, 저 바다에 내 몸이 묻히기를 바랐던 때도 있었다. 삶이 힘들어 이젠 영원히 눈 감자고, 갯펄을 따라 바다로 기어들어 가던 때, 뭉턱뭉턱 발가락 사이로 삐져나오는 갯펄의 느낌은 차라리 쾌감이기도 했다. 차가운 바닷물이 내 발목을 적시고 종아리를 적시고 허벅지를 적셨다. 그렇게 나는 바다로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느꼈다. 내 발가락에 걸려 있는 운동화 두 짝. 죽기를 작정하고 허위허위 바다로 기어들어온 나. 그런데 내 손가락 끝에 걸려 있는 운동화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내면에 숨어 있는 감출 수 없는 생의 욕구가 아닌가?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더러워서 바다를 되짚어 나오고 말았다. 죽을 바에는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이야깃거리를 던져 주고 죽고 싶다. "허, 참, 그 학생이 그렇게 엉뚱한 모습으로 죽다니..." 그렇게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닌가? 나는 문득 생각해 냈다. 그렇다. 세종로 광장에 우뚝 솟아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 그의 목에 새끼줄을 매고 축 늘어져 죽으리라. 그러면 아마도 뭇사람들은 그 광경을 놀라워하고, 동정하고, 비웃고, 비난하리라. 그러한 생각에 가끔 사로잡히는 때도 있었다. 젊은 시절은 상처 받은 마음으로 하여 쉽게 죽음을 생각하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그 아픔의 시기를 보내면서 가끔은 맨주먹으로 시멘트 바닥을 마구 쳐 두 주먹을 그대로 으깨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한 순간들, 그 고통의 순간들을 견디면서 인생을 체득해 나가는 것이리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별 탈 없이 대학에 쑥 들어가는 일은 행운이요 효도다. 재수 삼수의 길을 걷는 것은 분명 고통이다. 그러나 재수 삼수의 어두운 터널을 뚫고 마침내 대학에 합격해 보이는 것은 콧날이 찡 하도록 장하다. 그리고 그들이 겪은 진한 회색빛 아픔들이 오히려 그들을 성숙하게 해 줄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젊은 시절에 많은 체험을 한다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 체험이 고통이요 슬픔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겨내었을 때 느끼는 인간 승리의 희열, 그 자신감은 그의 삶을 버텨 주는 지렛대 역활을 할 것이다. "젊어서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 산다" 하는 선인의 말씀은 그런 점에서 진리인 것이다. 젊은이여, 너에게 다가오는 고통이 있다면 피하지 말라. 눈 감지도 말라. 오히려 그것을, 너를 귀하게 쓰려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라. 그리하여 고통을 견디고 고통의 색깔을 파악하라. 드디어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살아온 날들을 추스릴 때에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의 고통을 이겨냈다. 그 고통은 밤처럼 캄캄했었다. 고통을 이겨냈을 때 나는 성큼 자란 내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고통을 체험함으로써 이제 나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아픔을 속속들이 이해한다. 고통을 내게 주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젊은이여, 고통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제2부 뜨거운 가슴에 파묻는 노래 빈 손에 모아 담는 햇살 유경환 빈 손에 모아 담는 햇살 손가락 사이듯 나날의 틈새로 흩어져도 거꾸로 흐르는 여울을 잠재운 뒷날에 벌린 손 가득히 담기는 보석이리. 빈 손에 모아 담는 햇살 가슴 깊은 바닥 찌르는 말씀이어도 우리들 시대의 농아들, 말하는 뒷날에 저 하늘 높음을 가까이 낮추리. 빈 손에 모아 담는 햇살 끝내 빈 손이 꺾여도 흙손 손목 찾아내 깨끗이 씻어 주는 뒷날을 믿고 연습처럼 두 손 앞으로 내미는 것이리. 이 산하의 숨소리를 웬지 고독해 보이는 10년만에 고국에 온 친구 캐나다에 이민 간 대학 동창이 오랜만에 고국 나들이를 나왔다. 이민 간지 15년이 되어 처음으로 찾아든 것이다. 영농 기계를 제작하는 회사에 다닌다는 그. 월 수입 3천 달러가 넘고 이젠 생활의 기반도 다졌노라고 했다. 집에는 자가용이 두 대나 있고, 휴가철이면 북미 여러 곳을 여행하였노라고 했다. 나이아가라 폭포, 록키 산맥의 장관,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의 모습, 침엽수림 울창한 캐나다의 산록. 그러나 TV를 보다가 간혹 낯익은 산하의 모습이다 싶으면 틀림없이 한국의 풍경이라고 했다. 동글동글한 산의 모습, 아기자기한 단풍, 잔잔히 흐르는 개울물을 대하노라면 왈칵 고향이 그리워, 그런 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그와 함께 북한산 기슭의 개울가를 찾았다. 물소리를 들으며 한 잔 술을 나누고 싶었다. 그리해서라도 외국에 나가 강인한 삶을 개척하는 외로운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북한산은 그 근육질의 당당한 모습을 드러낸 채 허옇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물살에 부딪쳐 반짝이는 돌들이 지난 세월을 속삭이고 있었다. 친구는 소줏잔을 든 채 북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늘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가고, 석양빛에 반사된 그의 옆모습이 웬지 고독하게만 느껴졌다. 우리는 소주를 많이 마셨다.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이야기 끝에 그는 독백처럼 되뇌었다. "돌아와야지, 돌아와야지." 그렇게 떠난 그에게선 아직 소식이 없다. 소쩍새의 울음소리 따라 온 밤을 가슴앓이 했다 대학을 갓 들어간 그 해 여름, 나는 친구 둘과 함께 무전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예나 이제나 시국은 소란했고, 나에겐 탈출이 필요했었다. 지금으로 치면 만 원 정도의 돈을 소중히 간직하고 나는 마치 공수부대원의 차림처럼 완전 무장을 한 채 미지의 세계로 훌훌 떠났다. 설악산 장수대에서의 첫 밤, 헛간을 지으려고 말뚝만 박아 놓은 곳에 우리는 몸을 뉘었다. 하염없이 걷다가 때로는 트럭을 얻어 타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낸 내 몸은 젖은 솜처럼 늘어졌다. 피곤한 마련해선 금방 빠질 것 같은데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니 웬일일까? 나는 손전등을 켜 든 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어디서 들려 오는 소리일까? 언제부터 들려 오기 시작했을까? 먹물을 부은 듯 시커먼 저 산자락에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아득히 들려 오는 새 울음소리. '쑥국 쑥국 쑥국...' 나는 그것이 소쩍새 울음소리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처음 듣는 소리이지마는, 그것은 예전부터 내 귀에 익숙했던 듯, 그 소리는 점차 내 가슴으로 스미고 들어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피 토하듯 울어 예는 그 새 소리를 들으며 내 가슴앓이는 온 밤을 계속하였다. 한 송이 국화꽃은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그 날 밤의 체험 이후, 나는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이해한다. '그렇게' 우는 것이 어떻게 우는 것인지를 나는 그 밤의 가슴앓이를 통해 절절히 이해한다. 내가 우리 나라 산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그 소쩍새가 골안개 피어 나는 저 산 속에서 살기 때문이리라. 그 여행을 통해 나는 정겨운 나의 산하를 만났다. 그것은 언어를 초월한 뜨거운 가슴의 순례였다. 한계령 험준한 재를 넘으며 6.25 전투의 자취를 더듬었고, 녹음 우거진 설악의 곳곳에서 신비한 전설의 숨결도 들었다. 낙산 의상대에서 맞이한 해돋이는 또 얼마나 가슴 벅찬 감동이던가. 푸르다 못해 투명한 동해의 물결. 강릉 경포대의 그 적적한 멋. 삼척 죽서루에서의 갯수 어린 하룻밤. 한 끼의 식사를 선선히 제공해 주던 바닷가 어느 어부의 친절. 단양 팔경으로, 영주 부석사로, 경주 불국사로, 부산 해운대로, 우리의 여행은 때로는 고달프게 때로는 감격으로 그 여름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 여행에서 내가 느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이 땅이라는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리고 나 아닌 '우리'가 바로 이 땅에서 태초부터 생을 영위하여 왔다는 자각이었다. 쟁기를 끌고 가는 황소의 울음소리가, 햇볕에 그을은 할아버지의 건강한 웃음 소리가 한껏 배어 이 땅 그곳은 바로 내 생존의 터전이기도 했다. 삶의 터전의 뜨거움을 일깨워 준 무전 여행 그 여름에 내 의식을 잠시 혼란시킨 것도 있었다. 그것은 천년의 숨결을 간직한 경주에서였다. 경주에 들어서면서 나는 흥분되어 오는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었다. 조상의 슬기, 조상의 예술혼, 조상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바램은 너무나도 벅찬 것이었다. 그러나 경주에서 느낀 것은 실망이었다.(그 당시 경주는 거의 버려져 있었다.) 하늘의 오묘한 이치를 관측한다는 첨성대, 그 첨성대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에 당황했고, 그 조그마한 건축물 어디에서 하늘을 관측했다는 것인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흥겨운 궁중 연회가 베풀어지곤 했다는 안압지는 이미 옛 멋을 찾을 길 없었고, 유상곡수의 풍류가 흘러 넘쳤다는 포석정은 그 작은 구도에 그만 낙심하고 말았다. 불국사 도량을 둘러보고 석가탑과 다보탑을 확인하고서야 나의 상처받은 가슴은 조금 위안을 받았다. 신라의 고도 경주의 사적을 예찬하는 수많은 문학자의 글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면 내 예술적 감각이 너무 형편 없어 그 고유의 미를 식별하지 못하는 것인가? 나는 한참 동안 혼란에 빠져, 경주의 고적을 대하면서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석굴암에 들어섰을 때, 나는 나의 허탈감은 완전히 불식할 수 있었다. 분명 화강암으로 조각한 불상이련만, 만지면 따뜻한 온기가 통할 것만 같은 석가여래상. 그 상호(부처의 얼굴)에 흐르는 잔잔한 미소는 가슴 깊이 녹아 들어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내게 주었다. 마치 옛날 이야기 잘 해 주던 옆집 할아버지를 만난 듯 그 푸근한 정에 나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돔 형식의 내부 벽면에 부조된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은 어떠했던가? 하늘하늘찬 천의에 가리어 다가오는 여인의 모습. 아, 그것은 완벽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렇다. 나는 그제야 깨우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의 미는 거대한 형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적인 미가 아니라, 아기자기하고 오순도순한 형태로, 부끄러운 듯 슬쩍 숨는 그런 미였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인간의 은은한 숨결을 드러내는 푸근한 미. 그러길래 오히려 거대함을 외면하는 것 아니겠는가? 나지막한 한국의 산처럼, 자연스레 숲을 가른 한적한 오솔길처럼, 한국의 미는 요란하지 않게 은근히 나타나 어느 결엔지 사람의 체내로 스며오는 것이었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설악의 옥녀탕이 뭐 그렇게 작으냐고, 한국의 폭포는 어린애 오줌발 같다고 타박했던 내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자연과 조화되어, 자연의 일부처럼 살아 온 우리 조상님네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예술은 그대로 자연 그 자체임을 왜 몰랐던가? 첨성대나 안압지가 볼품없다는 내 생각은 수정되어야 했다. 물론 깨끗하게 단장되지 못한 것은 가슴 아팠다. 그러나 천 여 년 전, 알천 냇물따라 서라벌에 울렸던 에밀레 종소리를 상상해 보라. 그러면 지금 내가 듣는 단순한 저 종소리가 아니라, 끈끈한 조상의 혼이 배어 나오는 종소리가 되어 다가오지 않는가! 그 해 여름 결행한 무전 여행은 나에게 국토의 뜨거움을 가슴깊이 일깨워 준 귀한 체험이었다. 이 땅에 스민 조상의 숨결을 벅찬 가슴으로 안자 남한산성의 솔바람 소리는 우리의 정신마저 쇄락하게 만든다. 우거진 송림이 아름답고, 성곽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서울의 모습이 그림 같다. 그러나 수학 여행 온 아이들은 고적 답사 같은 형식일 뿐 먹고 노는 데 정신이 없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어떻게 잘 놀았느냐가 추억거리일 뿐이다. 정말 그것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굳이 남한산성까지 올 필요가 어디 있는가? 차라리 학교 운동장에서 도시락 까먹고 장기 자랑이나 하면 될 것이다. 여행 비용 쓸 필요 없고 피곤하게 걷지 않아도 좋으니, 그 편이 얼마나 경제적인가? 그렇다. 수학 여행은 말 그대로 학업의 연장이다. 현장에서 산 교육을 몸에 익힌다는 것이 그 목적일 것이다. 어찌 즐겁게 놀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잠깐이라도 역사의 숨결을 더듬어 보라. 오랑캐에게 포위되어 결사적인 항전을 벌였던 곳, 수어장대에 울려 퍼지는 인조 대왕의 목소리를 느껴 보라, 사직을 지키기 위해서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최명길, 끝까지 항쟁하여 저들을 격퇴해야 한다고 강개한 목소리를 높였던 김상헌, 두 분 모두가 국가를 위한 것이었지만 길이 달랐으니 어찌 감회가 없겠는가? 이 풀 저 돌에 스며 있을 피와 살점, 그분들의 절규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지 아니한가? 결국에는 대와 자신이 스스로 결박하여 적장 용골대 마골대에게 항복의 술잔을 올렸던 삼전도. 그 비장한 모습에 우리의 피가 역류하지 않는가? 역사의 현장에서 역사를 상상해 보는 것은 나를 역사의 끈으로 묶는 작업이다. 그리하여 내 조국 산하에 스민 조상의 얼을 깨우치는 것은 바로 내것에 대한 뜨거운 애정의 열림이리라. 조국이란 무엇인가? 이 땅이 조국의 형식이라면, 나는 그 조국의 내용(알맹이)이 아닌가?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을 일구어서 삶을 영위하고,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이 땅의 산수 속에서 풍류를 익혀 온 우리의 조상들 이러한 깨우침이 우리를 '우리'되게 하는 것 아닌가? 대한 민국은 이 땅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 너와 나의 삶은 이 땅 위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조상이 지켰고, 우리가 지키고, 또한 우리의 후손이 지켜 나갈 조국 산하. 경건한 마음으로 국토에 스민 조상의 손길을 확인해야 한다. 벅찬 가슴으로 내것을 안아 사랑을 부어 주어야 한다. 방학이 되면, 국교의 사적지라도 견학했으면 한다. 고 3이라면 대학에 진학한 첫 여름을 국토 순례로 보내기를 권한다. 그리하여 자아의 확립에 역사의 숨결이 스미도록 하라. 우정이 꽃피는 젊음 슬픔을 함께 할 진정한 친구는 어디에 옛날에, 부유한 집안의 외동아들이 있었다. 그는 세상의 어려움 모르고 부모의 귀여움 속에 자랐다. 물질의 풍족함은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무엇이나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의 버릇은 점점 나빠져갔다. 그가 장성하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돈 천 냥을 내놓았다. "얘야, 너는 세상 물정 모르고 컸다. 이제 내가 천 냥을 너에게 줄 테니 친구 사귀는 데에 마음껏 사용하거라. 진실한 친구 하나만 사귈 수 있다면 천 냥 값은 되느니라." 아들은 아버지를 비웃었다. 평소에 자기를 따르는 많은 친구들을 생각했다. 그 친구들이 실상은 그의 돈을 따른다는 것은 모르고... 아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돈을 물쓰듯 했다. 그의 주변에는 많은 친구들이 모였다. 그는 항상 칭찬의 말을 들었고, 대장으로 떠받들어졌다. 그의 어릴 때 친구 중에 돌쇠라고 하는 이가 있었다. 돌쇠는 방탕 생활에 젖어 있는 친구를 안타까워했다. "여보게, 그렇게 살아선 안 되네. 삶은 항상 검소해야 되네. 돈이란 값어치 있게 써야만 하네. 제발 정신 차리게." 그러나 아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초라한 그 친구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너무 잦은 잔소리가 역겹기까지 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의 친구였던 돌쇠와 절교했다. 천 냥을 한 푼 남김 없이 다 쓰고 난 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었다. "그래, 친구를 많이 사귀었느냐?" "물론입니다. 저를 좋아하는 친구가 100명은 넘습니다." 아들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좋다. 여기 금방 잡은 돼지가 한 마리 있다. 이 피에 젖은 돼지를 거적에 싸서 등에 지고서 너의 친구를 찾아가서 말해라. '내가 살인을 저질렀다. 나를 좀 숨겨 다오'라고. 그럴 때, 그 동안 사귄 네 친구 중에 너를 기꺼이 숨겨 줄 친구가 과연 있겠느냐?" 아들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럼요, 모두 저를 숨겨 줄 것입니다." 아들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 죽은 돼지를 등에 진 채 집을 나섰다. 천 냥을 아낌없이 써 가며 사귄 수많은 친구들이 눈에 선했다. 그는 드디어 한 친구의 집 앞에 당도했다. 그는 거침없이 친구에게 말했다. "사실은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네. 제발 나를 좀 구해 주게. 날 좀 숨겨 주게나." 친구는 안색을 바꾸며 대답했다. "나에게 살인자 친구는 없네. 경찰을 부르기 전에 빨리 다른 곳으로 가게." 돌아서는 친구를 보며 아들은 분했다. '저 녀석은 친구도 아니다. 내가 저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썼건만 이럴 수 있나. 좋다. 두고 보자.' 그는 다른 친구를 찾아 갔다. "제발 나 좀 구해 주게. 내가 사람을 죽이고 이렇게 시체를 메고 왔네." "살인자를 우리 집에 숨겨 줄 순 없네. 살인자 여기 있다고 외치기 전에 빨리 딴 데로 가 보게." 매정한 거절에 아들은 낙망했다. 그 다음 친구에게서도, 그 다음 친구에게서도, 그는 대문 밖에서 쫓겨나야 했다. 믿었던 친구, 그 누구도 그의 불행을 함께 걱정해 주지 않았다. 이제 그는 아무 곳에도 갈 데가 없었다. 그토록 다정하게 친구를 사귄 줄로 믿었건만, 사실 그는 단 한 명의 진정한 친구도 사귀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울었다. 아무도 자신의 어려움을 거들떠보지 않는 현실이 슬펐다. 마지막에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항상 자기에게 충고만 하던 돌쇠 그와는 이미 절교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발길은 마지막으로 돌쇠네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돌쇠를 찾았다. "자네가 웬일인가? 내 집엘 오다니..." 돌쇠는 놀라며 물었다. "여보게, 잘못했네. 내 사정 좀 들어주게. 내가 실수로 살인을 저질렀네. 제발 나 좀 구해 주게." 아들은 절망적으로 말했다. 순간, 돌쇠의 떨리는 목소리가 울려왔다. "뭐라고? 자네 뭐라고 그랬나? 살인을 했다고? 그렇다면 자네 등에 진 것은 무엇인가?" "시체라네." "그래?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아무튼 안으로 들어가세. 들어가서 앞일을 의논하세." 돌쇠는 황급히 그를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아, 진정한 친구란 누구인가? 내가 흥청거릴 때 내 비위를 맞추는 친구가 아니라, 항상 듣기 싫도록 타일러 주던 친구가 아닌가? 충고를 듣기 싫다고 절교를 선언했던 그 친구가 내가 절대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발 벗고 나서서 나를 구하려 애쓰지 않는가? 아들은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가를 깊이깊이 깨닫고 돌쇠에게 세월을 사죄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날 밤 늦도록 돼지고기를 안주 삼아 진정한 우정을 다지는 술잔을 나누었다. 서로를 은은히 감싸는 우리들의 우정 관중과 포숙의 사귐은 우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중국 춘추 전국시대 제나라의 현신들로 유명하다. 관중과 포숙은 어렸을 때부터 동문수학하였다. 관중은 매우 가난했고, 포숙은 부유했지만, 그 들은 경제적 격차를 뛰어 넘어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다. 관중과 포숙이 정치계에 뛰어들었을 때 그들은 각기 서로 다른 공자(왕자에 해당함)를 주인으로 섬겼고, 자신이 섬기는 공자가 임금이 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했다. 그러나 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포숙이 보좌한 공자였다. 새로 즉위한 임금은 왕위를 다투던 자신의 형제(관중이 보필했던 공자)를 죽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활을 쏘아 죽음 일보직전까지 가게 한 관중을 앞에 하고 대로하여 사형을 명했다. 그 때 포숙이 감연히 나섰다. "대왕께서는 천하를 갖고자 원하십니까?" "그렇다. 어찌 천하를 꿈꾸지 않고 이 자리를 바라겠는가?" "그러시다면, 사사로운 원한을 접으시고 관중을 살리셔야 합니다. 관중의 마음 속에는 천하가 꿈틀거리고 있고, 관중의 기상에는 경세제민의 포부가 있사오니, 관중을 얻지 않으시고 어찌 천하를 얻겠나이까? 관중이 비록 대역죄를 지었으나, 모시는 주군이 달랐으니 자신의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 어찌 아름답다 하지 않으오리까? 대왕께서는 노여움을 푸시고 천하를 위해 관중을 재상으로 중용하소서. 관중은 신보다 그 능력이 백 배 천 배 뛰어나니, 관중이 재상이 된다면 신도 그 밑에서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겠나이다." 왕은 관중을 용서하고 즉시 재상에 임명했다. 그리고 관중은 왕을 당대의 패왕의 자리에 올려 놓았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서로 경쟁의 위치에 있었던 관중과 포숙, 그리고 드디어 행운을 잡은 포숙, 그가 관중의 용서를 빈 것은 죽마고우로서의 옛정이라 할 수 있겠으나, 자신이 당연히 차지할 일국의 재상 자리를 사형수인 관중에게 양보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친구의 어려운 처지를 변명하고, 친구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왕에게 추천하는 포숙의 의연한 자세가 놀랍다. 그리고 그 진언을 포용한 왕의 도량, 왕으로 하여금 중국 천하의 패자가 되도록 열과 성을 다했던 관중 그들 모두에게 우리의 박수가 향해야 되지 않을까? 관중은 훗날 지난날을 회고하여 말한다. "내가 포숙과 더불어 장사했을 때 나는 포숙보다 이익을 많이 취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욕하지 않았다. 나에게 부양할 가족이 많음을 그가 알기 때문이다. 내 일찍이 세 번 전장에 나아가 세 번 다 물러났으나, 포숙은 나를 비겁하다 아니했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계심을 알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 주는 이는 포숙이다." 누가 행복한 것일까? 친구를 알아 준 포숙이 행복한 것일까? 친구에게 인정을 받은 관중이 행복한 것일까? 몇 년 전, 비가 참 많이도 내렸던 여름이었다. 여기저기서 물난리가 났고, 수재민도 많이 생겼다. 서울에 집중 호우가 쏟아 졌던 그 밤, 새벽 5시경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나는 잠결에 투덜대며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통을 통해 울려온 목소리. "괜찮아? 그쪽은 물난리가 났다는데 너희 집은 안전하니? 어서 텔레비전을 틀어 봐. 걱정이 돼서 전화했어." 이제는 바빠서 만나기도 힘든 산이의 일깨움이었다. 나는 가족들을 깨우고 대비를 했다. 다행이 물이 우리 집까지 차지는 않았다. 산이, 석이 서로를 알고 서로를 존중하는 우리들. 우리들 우정은 땡볕처럼 뜨겁진 않지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항상 은은하게 서로를 감싸고 돌았다. 고등 학교 2학년 때, 나는 한 소녀에게 흠뻑 빠져서 사랑 이외에는 아무래도 좋다고 절규하고 있었다. 당연히 내 성적은 엉망이 되었고, 처참하리만치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심각한 낯짝의 산이와 석이가 나를 낙산으로 불러냈다. 그들은 나를 매몰차게 꾸짖고 충고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들을 비웃었다. "웃기지 마라, 짜식아. 너희들이 사랑을 알아? 사랑의 이 쓰라린 고통을 알아? 정신을 못 차리면 절교라고? 그런 절교는 내가 먼저 하마." 큰소리쳤던 나는 결구 찢겨진 채 내동이쳐졌고, 그 상처가 아물도록 어루만져 준 것은 또한 그들의 손길이었다. 그들의 위로 속에 내 날개에 새 살이 돋았고, 그들의 부추김 속에 나는 다시 햇빛 속으로 나왔었다. 복된 삶은 우정이 넘쳐 흐르는 삶 우리는 남을 손가락질하며 말한다. "쟤는 나빠." 그러나 상대방을 향한 나의 손가락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를 가리킨 검지 손가락. 그렇지만 중지, 약지, 소지가 한꺼번에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가? 메아리는 울려 퍼진다. 산을 향해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내 이 산 저 산에서 대답한다. 산을 향해 외쳐보라. "너, 미워." 나의 외침은 단순하지만, 온 산들이 그만 화가 나서 나를 향해 마구 쏘아 붙인다. "미워, 미워, 미워..." 왜 산을 향해 "사랑해."하고 외치지 않는가. 한 번 외쳐 보라. 그러면 산들은 너를 둘러싸고 외쳐댈 것이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우정은 사랑이어서 좋다. 우정은 너를 위해 나를 희생해도, 그것이 기쁨이어서 좋다. 고독하다고 말하지 말라. 친구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너의 가장 평범한 친구에게 나 자신을 주어 보라. 진심을 말하고 네 마음을 털어 놓아 보라. 친구는 금방 내 가슴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그와 나는 훈훈한 정 속에서 '인간' 된 기쁨을 서로 나눌 수 있으리라. 선인들은 말한다. '평생 동안 마음을 줄 수 있는 친구 하나만 사귈 수 있어도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라고. 그러기 위해선 친구의 정을 먼저 받으려 하지 말고, 너의 사랑을 먼저 주라. 너나할것없이 듬뿍듬뿍 서로 먼저 주는 사랑이 있다면, 아 우리의 삶은 얼마나 복될 것인가? 젊음은 친구를 만드는 시절. 젊은이여, 네 가슴 속에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그리움을 네 친구에게 주라. 그리하여 우정이 넘쳐 흐르는 우리 기쁜 젊음을 정겹게 서로 나누려무나. 나도 내일 저녁엔, 산이, 석이와 더불어 돼지고기 앞에 하고 술 한 잔을 나누어 보련다. 진실에 눈뜨는 시심 자연은 변함이 없으나 사람들은 살기에 바쁘고 가을비 내린 날 아침은 쌀쌀함을 느끼게 한다. 떨어지는 낙엽. 빠알갛게 익어 매어 달린 감. 뜰 한구석엔 모과잎이 푸르다. 어제도 보고, 그제도 보았을 나무. 나무들이 오늘따라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파트 각진 모서리에 덩그렇게 걸린 달.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그 달은 오늘도 뜬다. 그러나 도회지의 휘황찬란한 불빛은 달을 가린다. 달은 거기에 천 년을 두고 있지만 이젠 보아주는 이 아무도 없다. 한강대교를 건너 노량진쪽으로 내려 갈라치면, 항아리보다 더 큰 태양이 도시를 내려다 보며 뉘엿뉘엿 스파이라인에 기대어 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눈부시다. 그리고 그 시각에 내가 그 태양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진다.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잎을 떨구며 순수의 본질로 화하는 나무. 아침이면 내 잠을 깨우는 참새의 울음소리 자연은 그렇게 도심에도 존재하는데 사람들은 이제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한다. 다만 살아가는 이야기에 신경이 집중되어 있을 뿐이다. 시는 사치가 아니라 순수요 진실이다 시란 무엇일까? 시는 다만 문화란 이름의 사치일까? 물론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시가 가지는 의미를 우리는 잘 몰라도 시가 주는 기쁨을 우리는 안다. 싱그러운 햇살을 대하면 워즈워드가 생각나고, 낙엽 진 포도 위를 걸으면 구르몽이 떠오른다. 황량한 들판에서 헤르만 헷세를 만나고, 잠 못 드는 밤이면 소월의 가슴앓이를 닮는다. 그러기에 시는 순수요, 진실이다. 생활이란 베일 저편에 가린 인간의 진심이 시란 언어로 표출되어 나타난다. 그렇게 나타나는 시는 가만히 있다가 내가 손을 뻗치면 다가와 아픈 나를 울리고, 생각하게 하고, 서글퍼지게 만든다. 시를 쓰는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자신의 느낌을 기록하지만, 그것은 같은 심정을 갖고자 하는 사람에게 인색하지 않다. 그러기에 시를 쓴 사람의 양해 없이도 우리는 시인의 가슴 속을 들여다 볼 수 있고, 우리의 가슴 속도 들켜 버린다. 그러므로 시는 순수요 진실이다.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것은 독자의 입장에서의 물음이다. 물론 시가 가지는 기본적 틀이 있다. 시를 소설이라거나, 수필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시만이 가지는 형식적, 내용적 틀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감상한다면 시에서 얻는 기쁨은 더욱 더 크리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의 이 짤막한 시는 읊조리는 것이 곧 노래다. 3음보(3.3.4조)의 가락을 이해하고 읊어 보면, 흥얼흥얼 그것은 노래로 화한다. 이 시에 '아리랑' 가락을 청승맞게 붙여 노래해 보라. 잠시 글 읽는 것을 중단하고 천천히 이 시에 '아리랑' 가락을 붙여 천천히 흥얼거려 보라. 읊어 보았는가? 그 느낌이 어떻든가? '아리랑'이 가지는 처연한 서글픔과 한을 함께 느끼게 될 것이다. 시가 가지는 가락은 이렇게 내용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엄마, 누나'는 누구인가? 영원히 그리운 사람이다. 부르기만 해도 푸근하게 정겨운 사람이다. 그 그리운 사람을 부르는 주인공은 고독한 사람이다. 어디로 갈까? '강변'. 그곳엔 '금모래빛'이 있고, '갈잎이 노래'가 있는 곳이다. 신석정이 갈구하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 일 수도 있으리라. 앞뒤 맞물려 갈구하는 심정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이러한 구성법을 수미상관의 수법이라 한다. 그러면 과연 소월은 '엄마, 누나'와 더불어 '강변'에 살았을까? 우리는 소월의 비극적 삶을 잘 안다. '강변 살자'란 표현은 '강변에 살고 싶다'는 소망일 따름이지 그것이 실현이 아님을 안다. 그것은 마치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의 표현이 '청산'에 살지 못하는 사람의 한임과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눈물겹다. 아픔의 추스림 속에 새 살은 돋아나는 것 시를 너희들에게 가르칠 땐 안타깝다. 시가 가진 그윽한 샘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있는 대로 갈갈이 찢어 넝마로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시가 주려 하는, 아니 그것을 읽고 느낄 수 있는 정서만큼은 되도록 원형 그대로이어야 한다. 물론 시를 읽는 사람의 환경, 체험의 범위, 지적 수준에 따라 시가 주는 감동은 각기 다 다른 것이지만. 김남조의 "겨울 바다"를 읽어 보자.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이 시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선 서술어를 살펴보자. '__가 보았지. __ 죽고 없었네. __불 붙어 있었네.' '__지. __네'의 탄식조의 서술 어미는 이 시가 시인의 마음을 그대로 고백하는 형식임을 금방 알 수 있게 한다. 그렇게 그의 고백적 탄식이 가슴에 스며 온다. '겨울 바다' 매운 해풍만이 몰아치는 허허로운 곳. 허옇게 이빨을 드러낸 채 모래사장을 할퀴는 비정한 파도만이 존재하는 곳. 그 겨울의 차가운 바다를 찾는 사람은 이미 상처 받은 사람이다. 생활이 그를 속였거나, 목숨처럼 사랑한 사람을 잃었거나, 그래서 실컷 통곡하고 싶어도 차마 통곡하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자신을 내동댕이치기 위해 찾아드는 곳이 겨울 바다이리라. 꿈을 머금은 소라 껍질의 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그곳에서, 상처받은 그가 확인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보고 싶던 물새의 죽음. 말라붙은 진실의 눈물. 그래서 오직 허무의 불길만이 무심히 몰아치는 저 바다에 존재할 뿐. 그의 영혼은 상처받았고, 그의 아픔은 벼랑에서 서 있음을 우리는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삶을 우리 가슴에 담아 함께 아파한다. 그러나 삶은 이어지는 것. 아픔을 추스리는 곳에 새 살이 돋아나고, 죽음의 터밭에 새 싹이 움트는 것. 이 시의 값짐도 이런 사고로의 전환에 있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떡이며 끄떡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그렇다. 아픔의 세월을 오히려 우리에게 생의 성숙을 깨우친다. 산산이 조각난 내 지난 삶도 이 겨울 바다에서 위로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더욱 필요한 것은 삶의 진실을 위한 간절한 갈구뿐.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김현승의 영혼은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고독하기를 기도한다. 그러한 소망이 필요한 이유는 절대 순수의 경지에서만이 초월자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현승의 고독한 영혼처럼 이 "겨울 바다"의 시인도 '기도 뒤에 나타나는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기'를 갈망한다. 무너지는 아픔, 깨어져 버린 소망 그것은 오히려 생의 진실을 더욱 진실되게 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더욱 가까운 것처럼. 여지껏 살아온 삶의 모습이 결국은 이 겨울 바다처럼 허허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참삶의 모습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아니 그러한 추구의 자세로 남은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리라.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이제야 추스릴 수 있다. 저 겨울 바다가 단순한 죽음의 바다, 얼어 붙은 허무의 바다가 아니라, 고통의 감내를 일깨워 주고 새로운 소망을 소생시켜 주는 바다라는 것을 이제는 깨우칠 수 있다. 허연 수심 속에 우뚝 솟아 있는 인고의 물기둥 그것은 나에게 깨어지지 말라고, 허물어지지 말라고 준엄하게 타이르고 있지 않은가. 겨울 바다 상실의 모습과 재생의 모습을 함께 보여 주는 그곳. 드디어 시인은 그 겨울 바다에서 구원을 받는다. 그것은 결국 스스로를 지탱하려는 시인의 의지요, 시인의 지성이다. 하여, 그의 의지로 하여, 읽는 우리도 내던져진 구석에서 다시 일어섬을 느낀다. 황량한 가슴을 열고 맑은 정서의 샘물을 마셔 보자 시란 무엇일까? 그것을 따지기 전에 먼저 한 편의 시를 읽어 보자. 가슴을 열고 내 안에 잠재해 있는 맑은 정서의 샘줄기에 시를 접맥시켜 보자. 그러면 알리라. 시는 곧 내 마음이며, 내 이웃이며, 내 삶이라는 것을. 그리고 시인의 영혼을 배워 보자. 그들의 호소연, 그들의 속삭임, 그들의 절규, 그들의 신념, 그들의 소망 그것이 곧 나의 정서를 맑게 하고, 나의 체험을 풍성하게 하고, 나의 영혼을 살찌운다는 것을 깨우쳐 보자. 좁은 어항 속에서도 잔돌을 굴리며 즐기는 물고기. 보아 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도 어김없이 뜨고 지는 달. 가녀린 가지가 휘도록 매달린 빠알간 감. 하나의 나이테를 더하기 위해 나뭇잎을 떨구며 성숙을 준비하는 나무. 이제 곧 온 산을 덮어 순수의 극치를 장식할 눈 이 모든 것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그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오고 가는 계절은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 그 성숙은 사물에 대한 인식을 더욱 뿌리 깊게 한다. 이 가을에는 한 편의 시를 읽자. 딱딱한 껍질로 감추어진 우리의 시심을 일깨워, 깊이 있는 삶의 근원으로 좀더 가까이 다가서 보아야 하리라. 잊을 수 없는 선생님 어머님처럼 푸근한 선생님의 모습 권춘애 선생님. 일흔이 넘으신 선생님께서 외롭게 혼자 살아 가신다. 국민 학교 6학년 때 우리를 담임하셨던 아리따운 처녀 선생님. 권춘애 선생님께서 정년 퇴임을 하시고 이제는 쓸쓸히 여생을 홀로 살아가시는 것이다. 요사이 선생님께서는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고 한다. 찾아 뵈어야 하는데, 어머님 같은 우리 선생님, 찾아 뵈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쉽게 찾아 뵙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게으름 탓일 것이다. 지난 번 선생님께서 칠순을 맞이하셨을 때, 우리 졸업생들은 정성을 다해 선생님을 모셨다. 선생님에게 층층이 가르침을 받은 선배, 후배들이 한데 어울려서 의논을 하고, 추렴을 하고, 그래서 조촐하게 칠순 잔치를 마련해 드렸다. 그 날 선생님은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평생을 혼자 살아가시면서도 교육에 헌신하신 보람을 진정 느끼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선생님을 어머님처럼 따른다. 그리고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선생님이 우리를 지성으로 가르치셨던 지난 날의 추억을 못 잊어, 어느덧 우리들이 홀로 사시는 그분의 아들 딸이 되겠다고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머님의 안부가 궁금하다. 가끔은 몰려서 또는 혼자라도 우리는 선생님을 찾아간다. 아직도 잔영처럼 남아 있는 수선화 같은 아름다운 모습, 그 잔잔한 미소, 청랑한 음성. 그 속에서 우리는 눈부신 국민 학교 때의 추억을 되살리며 선생님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기분에 젖어드는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생활 예절을 익혀 주셨던 박창례 선생님 '욕'이라고 하는 것을 한 마디도 해 보지 못했던, 그리고 한 살만 많아도 '형님, 누나'하며 존대말을 쓰는 법을 배웠던 내가 중학교에 올라와서 겪어야 했던 혼란은 매우 컸다. 여러 국민 학교에서 진학해 온 잡다한 학생들이 마구 욕지거리를 해 대었으나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함부로 욕을 하는 그들의 모습이 매우 불안하게 느껴져 혼자 조바심을 하곤 했다. 나는 지금도 욕을 하는 데에 능숙하지 못하다. 반말을 하는 데에도 익숙하지 못하다. 나는 지금도 나이 젊은 사람에게 일상적으로 존대말을 쓴다. 무안하다고 말씀 낮추시라고 하는 만류를 받으면서도 내 습관이라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 습관은 어디서 길들여졌는가? 국민 학교에서 배운 것이다. 내가 다닌 국민 학교는 사립 학교였다. 사립 학교라고 하니까 대단한 특수 학교를 다녔나 보다 하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6.25를 전후하여 1950년대 사립 학교란 어쩌면 공립 학교 수준만도 못한, 그러나 설립자의 뜻이 매우 강하게 반영되는 그러한 학교였을 것이다. 우리 학교는 처녀 교장 선생님이 설립하셨다. 박창례 교장 선생님. 선생님은 일제 시대의 도살장 자리를 그들이 물러간 뒤에 불하 맡으셔서 학교로 꾸미셨다. 따라서 학교는 매우 협소하고 낡았다. 처녀 교장 선생님께서는 모든 일에 앞장을 서셨다. 각기병이 걸리셔서 몸이 뚱뚱하셨던 박창례 선생님. 손가락으로 장딴지를 누르면 들어간 살이 한참만에야 나오곤 하는 교장 선생님. 그 교장 선생님의 교육 방침은 참으로 남달랐다. 우리는 학교에 다니면서 절대로 욕설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욕을 하면 무자비한 체벌이 가해졌다. 동급생이라고 해도 한 살이라도 나이가 위면 '형님, 누나'라고 부르게 했다. 나는 지금도 우리 반의 여자 반장이었던 동창생을 '누나, 누나'하고 부른다. 박창례 교장 선생님은 기본 예절 교육에 철저하셨다. 우리의 말투는 항상 존대말이었다. 그것도 '__하셔요'라는 어설픈 존대말이 아니라 '이랬습니다, 저랬습니다, __하셨습니다'라고 정확하게 말해야 했다. 외부에서 손님이 오시면, 그분을 발견한 어느 학생이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려 인사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어느 선생님을 찾아오셨습니까?" "이리 오십시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안내를 했다. 그 안내하는 방법도 반드시 손님을 모시는 오른쪽 자리에 빗겨 서서, 약간 앞서 가면서 손님을 모시도록 교육받았다. 문을 여닫는 방법, 말하는 억양, 말투, 청소하는 방법 등 모든 것을 우리는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우리의 청소 방법도 특이했다. 마루를 깐 교실 바닥에는 겨자물을 먹이고,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도록 차돌로 닦았다. 재래식 화장실이 얼마나 더러웠을까마는, 우리는 물걸레를 손에 들고 화장실 바닥을 깨끗하게 훔쳐냈다. 그러한 청소의 습관이 지금도 우리 몸에 배어 있다. 우리들이 벌을 받는 방법도 특이했다. 누구 하나가 잘못하면 선생님은 연대 책임을 물으셨다. 그래서 수업 중에 떠드는 아이가 있으면 학급 전체가 눈 덮인 운동장에 나가 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맨발로 눈 속에 서 있는 체벌을 단체로 받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 빌미를 만든 아이를 원망하기보다는 서로 감싸 주려고 노력했다. 우리 학교는 한 학년이 한 학급 내지는 두 학급밖에 되지 않는 미니 스쿨이었다. 그러나 시 단위의 체육대회, 배구대회에서 결코 다른 학교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응원전은 지금 생각해도 엄격하고 조직적이었다. 응원하는 우리들은 선수들보다 오히려 더 게임에 몰두하고 응원에 전력을 다했다. 가끔 응원석을 이탈할 수 없어서 바지에 오줌을 싸고는 했다. 사행심을 조장하는 모든 놀이는 금지되어 있었다. 나는 동네 뒷골목에서 구슬치기를 하다가 우리 반 여학생에게 들킨 적이 있다. 그 여학생은 학급 자치회 시간에 내 이름을 들먹였다. 그 벌로 나는 캄캄한 광에 갇혔다. 밤이 깊을 때까지 나는 그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무서워 떨면서 다시는 구슬치기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철저한 예절 교육,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삶의 교육을 시키시는 한편, 우리에게 많은 정신적 교훈을 남기려고 노력하셨다. 5,6학년 때 우리는 학교를 지킨답시고 열 명씩 조를 짜서 학교에서 잠을 자곤 했다. 그 당시 교장 선생님께서는 학교 사택에 사셨는데, 밤이면 우리를 불러 모으셔서 옥수수를 삶아 주시곤 하셨다. 그리고 옛날 이야기, 중국의 한서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 또는 그림자도 없고 발도 없는 귀신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 주시곤 했다. 귀신 이야기라도 들은 날에는 짝을 맞추어 학교 순찰을 돌면서 우리는 매우 무서워했다. 특히 후미진 화장실을 순찰 돌 때에는 서로 겁을 먹고 뒤꽁무니를 뺐었다. 혹시 몽당 귀신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고. 우리는 교실에서 책걸상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담요를 깔고 덮고 자곤 했다. 제일 곤혹스러운 일은 한밤중에 오줌이 마려워서 깨는 때였다. 화장실까지 갈 엄두는 전혀 낼 수 없었다. 들키면 큰일날 일이지만, 화단에 얼른 오줌을 누고는 이불을 푹 뒤집어 썼던 우스운 기억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렇게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던 우리들, 그 교육은 단순하게 습관을 고치고 만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마저 그렇게 길들여 준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학부형들은 처녀 교장 선생님의 교육 방침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래서 자녀들을 잇달아 그 학교에 넣지 못해 안달을 했다. 나도 우리 막내 누이의 국민학교 후배이니 말이다. 그렇게 철저하게 받은 교육이 중학교에 가면서 다른 학교의 일반 교육과 부딪쳤을 때, 정신적으로 대단히 혼란스러웠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욕설이 난무하고 구슬치기, 딱지치기, 싸움 등이 대수롭지 않게 행하여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당혹감을 참지 못했다. 화장실 뒤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나는 혼자서 조그맣게 중얼거려 보았다. "야, 이 자식아, 이 나쁜 놈아!" 그 소리에 내 스스로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 보았다. 아무도 나를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뒤로 주변의 아이들이 하는 욕설에 나도 모르게 젖어드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나 자신을 혐오하곤 했다. 만약 박창례 교장 선생님께서 국민 학교뿐만 아니라 국민 학교에 이어 중, 고등 학교도 만드시고, 그와 같은 정신으로 일관된 교육을 해 주셨다면 아마도 우리는 좀더 훌륭하고 반듯하게 자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아무튼 오늘날의 내 행동에 예절과 양식이 조금이라도 배어 있다면, 그것은 국민 학교 때 철저하게 교육받은 덕택일 것이다. 나를 크게 키우신 남상협 교장 선생님 나는 중, 고등 학교 시절을 거의 장학금을 받으며 지냈다. 그러다가 고등 학교 1학년 말 갑자기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우리집은 풍비박산이 났다. 어머니는 큰 누님 집에 얹혀 지내시게 되고, 나는 당분간 사촌 형님 댁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사랑받고 귀염받던 응석받이 시절은 끝이 났고, 고통과 좌절의 세월이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고등 학교 2학년 되면서 나는 장학생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내 집안 형편에 밀려 평소와 같은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한 결과이리라. 어렵게 2학년이 흘러가고 3학년이 되었다. 그러나 3학년 초, 나는 어느 반에도 배정받지 못했다. 2학년 4기분의 등록금 중에서 3기분의 등록금을 못 냈기 때문이었다. 3월 초 나는 열심히 학교에 나갔지만, 어느 반에서도 내 출석을 부르지 않았다. 오늘 이 반에서, 내일은 저 반에서 눈치를 보며 공부했다. 2,3 교시가 지나고 나면 공연히 괴롭고 서글퍼서 더 수업을 받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책가방을 들고 휑하니 교문을 빠져 나왔다. 수위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다니기를 보름쯤 했던 것 같다. 어떻게 그 치욕의 나날을 견디어 냈을까? 그만두어도 벌써 그만두었을 학교를 나는 미련스럽게도 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그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면 나의 학업은 거기에서 중단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의 인내가 거의 한계에 도달하여 학교를 포기하려고 할 즈음, 교장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머리가 백발이어서 '백대가리, 백대가리'하고 놀렸던 우리 교장 선생님께서 인자한 미소로 나를 맞았다. "서 군, 대단히 힘들지?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좋은 때만 있는 것은 아닐세. 힘든 시절이 한 번쯤은 있는 법이야. 그 고난의 시기가 자네에게는 빨리 다가왔을 뿐이지. 등록금을 3기분 내지 못했더군. 좋으네, 2학년 것은 물론 3학년 전 학년도 장학생으로 처리해 주겠네. 열심히 견디게. 그리고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내 잔등을 두드려 주시는 그분의 손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폐부를 찔러 눈물을 만들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의 배려로 나는 나락에서 구원받았고, 삶의 새로운 용기를 지니게 되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 생활도 열심히 해 나갔다. 학생 회장으로서 학교 살림도 맡아 보았고, 성적도 최상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대학도 문제없이 해결되겠거니 생각했었다. 물론 고등 학교를 졸업한 뒤에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만 2년간의 공백을 나는 대단히 힘겹게 보냈지마는. 지금도 내 모교에는 2,3학년 동안의 7기분 등록금을 내지 않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에게 장학금을 주신 뜻은 무엇인가? 나에게 고등 학교를 그냥 다니도록 배려해 주신 남상협 교장 선생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받은 것의 열 배, 백 배를 다음 세대를 위해서 쏟으라고 하는 그분의 무언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나는 그분의 가르침을 잊을 수 없어, 장학 법인을 설립하고 내 후학들을 위한 장학 기금 적립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후학들을 위해서 베푼다 할지라도 그 당시 교장 선생님께 받은 은혜와 감격을 모두 갚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를 만들어 주신 잊지 못할 선생님 우여곡절 끝에 나는 사범 대학을 졸업하고 교단에 섰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신명이 났다. 20평 좁은 공간에서 아이들의 눈빛과 나의 눈빛의 부딪침을 느끼는 짜릿한 순간. 아이들의 숨결과 나의 숨결이 한데 어우러짐을 깨닫는 기쁨의 순간. 교직은 가치있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배우면서 가르치는 작업은 보람되었었다. 나는 여러 특별 활동반을 담당했었다. 웅변반을 창설해서 지도했었고, 문예반을 담당하고 교지를 발간하는 것은 국어과 교사로서 어쩌면 당연한 임무였는지도 모른다. R.C.Y반을 지도하고 응원단장 노릇도 톡톡히 했다. 그렇게 왕성하게 교사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정성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은 항상 나를 정성스럽게 가르쳐 주시고 이끌어 주셨던 선생님들의 숨결이 깃들여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에게 영향을 주셨던 분들이 한두 분이었겠는가? 가르침을 주신 모든 선생님들, 그분들을 나는 한 분 한 분 기억하려고 애쓴다. 그분들이 가르쳐 주신 지식, 그 지식을 뛰어 넘어 내게 전달되어 왔던 그분들의 인간미, 그리고 그분들의 숨결,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 오늘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야 나는 나를 가르쳐 주신 국민 학교, 중학교, 고등 학교, 그리고 대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을 그리워하고 존경한다.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이 만났던 스승들, 그분들은 그대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의 보람을 삼으셨을 것이다. 그대들과 더불어 생활하고, 저녁에 동료와 더불어 술 한 잔을 나눌 때에도 그대들의 이야기가 주 토론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세월은 흘러 그대들은 변한다. 그대들은 변하여 어른이 되고 장년으로 변하지만, 선생님들은 변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해마다 똑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여,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책상 위에 카네이션 한 송이를 놓아 보자. 선생님께 감사의 편지라도 전해 보자. 스승과 제자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가는 삶,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 아니던가? 봉사는 삶의 기쁨이요 보람인 것을 R.C.Y OB 모임의 감회 지난 봄 대한적십자사로부터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R.C.Y 창립 40주년 행사 안내였다. R.C.Y Red Cross Youth 청소년 적십자. 우리가 중, 고등 학교 다닐 때에는 J.R.C라고 불렀다. Junior Red Cross. 청소년 적십자단. 옛날에 활동했던 것을 어찌 기억해 내고 이렇게 서신을 보내는 것일까? 참으로 감회가 깊었다. 나는 고등 학교 때 우리 학교 J.R.C단장을 지냈고, 경기도협의회 의장도 맡아 했다. J.R.C 전국협의회 부회장이 되어서는 경무대로 윤보선 대통령을 예방하는 영광을 갖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무심하게 가입했던 J.R.C, 처음에는 좀 창피하다는 생각이 강했다. 매주마다 길거리 청소에 나서고, 학교 운동장을 쓸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그러한 일들이 자칫 동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 같아서 때때로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선배들의 따뜻한 격려와 리드, 그리고 점차 넓혀가는 교우 관계, 앙리 듀낭이 내세우는 적십자 정신에 대한 공감. 그러한 것들로 해서 어느덧 고등 학교 때에는 J.R.C활동에 깊숙히 몰입해 있었다. 행사날 나는 프레스센터에서 정겨운 분들의 모습을 많이 대했다. 강영훈 대한적십자사 총재님, 그리고 우리가 J.R.C활동을 하던 때에 대한적십자사 청소년 부장이셨던 서영훈 선생님(선생님은 그 뒤 KBS 사장을 거쳐 홍사단 대표 등 사회지도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다), 그 외 각 시도별 대표들을 만났다. 잘 모르는 얼굴 얼굴들 속에서 "우리는 한때 뜻을 같이 했지."라고 하는 동지 의식을 느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휴화산처럼 꺼져 있던 내 마음 속에 사랑과 봉사의 횃불을 다시 한 번 켜보는 시간이었다. R.C.Y, 너의 이름에 축복과 영광이 있으라. 봉사를 몸으로 익혔던 고등 학교 시절 아이들은 J.R.C를 '지랄씨, 지랄씨'하고 놀렸다. 처음에는 그 소리가 참으로 듣기 싫었지만 나중에는 나 스스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그럼, 지랄을 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인가? 지랄을 하지 않고서야 어찌 우리가 더 나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겠는가? 지랄을 하자. 나는 지랄씨다." 그러한 자부심과 긍지를 마음 속에 키웠다. 고1 때이던가? 그 여름에 몰아친 '사라호' 태풍은 아직도 많은 분들이 기억할 만큼의 엄청난 피해를 이 땅에 남겼다. 수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수많은 이재민이 집을 잃은 채 학교 운동장에서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풍의 악마가 할퀴고 지나간 그 보기 싫은 흔적을 우리는 다시 복구해야 했다. J.R.C도 나섰다. 나는 어깨에 수재 의연금 모금함을 메고, 길거리로 상점으로 헤매고 다녔다. 무심한 사람들도 있었고, 빈정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사회는 따뜻했다. 수십 리 길을 걸으면서 모금을 하고, 내 마음처럼 뿌듯한 그 모금함을 메고 적십자사를 향해서 돌아오는 발걸음은 참으로 가볍고 흥겨웠다. 돌아올 때는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목장길 따라 밤길 걸으며 고운 님 함께 집에 오는데 ... 봉사는 무엇인가? 남을 위함이다. 봉사는 무엇인가? 나보다 못한 남을 섬기는 일이다. 그러한 봉사 속에서 우리는 생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J.R.C의 중요한 사업 중의 하나는 농촌 계몽 운동이었다. 나는 고등 학교 1학년 여름 방학부터 농촌 계몽 운동에 나섰었다. 고등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여섯 차례나 농촌을 다녀왔다. 도회지가 고향인 나로서는 농촌의 전원적 풍격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농촌은 마치 내 마음의 고향처럼 느껴졌었다.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고등 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열흘 동안 다녀왔던 그 곳,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입석리 상입석 마을. 그림 같은 그 곳에서 우리 일행 4명은 농촌 봉사를 한답시고 많은 땀을 흘렸다. 시골 분들 보시기에는 가당치 않은 일일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열심히 노력했다. 아침에는 마을 청소를 하고, 오전에는 동네 꼬맹이들을 모아 놀이도 하고 공부도 가르쳐 주고 했다. 오후에는 이곳 저곳 다니며 김도 매주고, 변소며 돼지우리며 소독도 해주었다. 잡초 뽑는 일도 부지런히 했고, 할 줄 모르는 밭농사를 거들어 보기도 했다. 저녁에는 마을 어른들을 모시고 장기 자랑이며 연극이며 이런저런 일로 그분들을 즐겁게 해 드리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열흘을 지내니 정이 들대로 들 수밖에 없는 것, 농촌 계몽 활동을 끝내고 동네를 떠날 때에는 아이들과 얼싸안고 울음 바다가 되곤 했다. 버스가 산자락을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이들은 열심히 손을 흔들었고, 우리는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외면한 채 눈시울을 훔치곤 했다. 우리들의 짐 속에는 작별을 아쉬워하며 쥐어 준 삶은 계란, 따끈한 감자, 옥수수 등이 들어 있었다. 이우경 국민 학교 6학년 남학생, 참으로 똑똑한 아이였다. 김봉순 국민 학교 3학년 여학생, 단발머리가 너무나 짧아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심술궂은 아이였다. 그 아이들과 한참을 편지를 교환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소식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제 그들도 40대 나이가 되어 있으리라. 그들도 당시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까? 봉사는 내 의식을 어른으로 만들었다. J.R.C를 통한 나의 봉사 활동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된 편이었다. 경기도 일원의 농촌 마을을 여름 겨울 방학 때마다 순회하면서 나는 깨우쳤다. 농촌의 현실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농민들의 땀방울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우리는 농촌을 그리워한다. 농촌이 고향이기를 바란다. 전원풍경 속에 아늑히 안겨서 풀벌레 소리 들어가며 옥수수 구워 먹는 정겨운 장면을 머리 속에 그려보곤 한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농촌 현실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삶이었다. 도시에 비해 어림도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보건 문제, 의료 문제, 교육 문제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농촌을 다녀보지 않고서는 농촌의 아픔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그 때 절실하게 깨달았다. 농촌 봉사 활동을 계속하면서 나의 의식은 성큼성큼 자라고 있었다. 방학을 지내고 나면 그 때마다 새롭게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을 가지곤 했었다. 나는 사회에 눈을 뜨고, 봉사에 눈을 뜨고 무엇인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늘의 나를 닦아 가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했다. 어렵게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대학 시절의 서클 활동에 나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등 학교 교사가 되었을 때 나는 기꺼이 R.C.Y 지도 교사직을 맡았다. 내 학창 시절의 그 봉사의 기쁨을 이제 우리 학생들에게 심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교직을 떠나 사회 활동을 해 나가면서 그래도 내 밑바탕에 어려 있는 가장 중요한 정신이 봉사 정신임을 문득문득 깨닫는다. 만약 나에게 있어서 조금이라도 사회에 공헌하고자 하고, 사회의 어려운 구석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 학창 시절에 체험하고 깨달았던 J.R.C봉사 활동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봉사 정신은 고귀한 이상을 꽃피우는 밑거름 오늘날 우리 학생들은 공부 이외의 일들을 제한당하고 있다. 오직 대학 입시에만 얽매여서 인간다운 삶을 배우는 다른 방법들을 모두 유보당하거나 상실하게 되고 만다. 우리의 학창 시절에도 대학 입시는 치열했다. 그러나 공부 이외에도 살아가는 모습들, 예컨대 특별 활동이라거나 써클 활동이라거나 봉사 활동에 많은 관심을 쏟았었다. 지금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왜 이래야만 되는 것인가?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고쳐야 되는가? 해답은 자명하다. 현재의 대학 입시 제도를 과감하게 고쳐야만 한다. 대학 수학 능력 시험 이후 본고사가 생겨나면서 각 대학에서는 발빠르게 자율적인 전형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어떤 대학에서는 농촌 지역 학생을 일정 비율 선발하겠다는 안을 내놓았다. 또 독립 유공자의 자녀인 경우 정원 외 일정 비율 이내에서 그들을 선발하겠다고 하는 대단히 환영할 만한 안을 내놓기도 했다.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한 방법론을 각 대학마다 독자적으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경 대학의 경우 어떠한 덕목이 가장 중요한가? 아마도 지도력일 것이다. 만약에 서울 대학교 법대, 경영대, 인문대의 정치학과, 외교학과 등에서 '우리 대학이나 학과의 경우 학생들의 지도력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초, 중, 고 시절의 학생회장, 학생회 간부, 반장, 부반장 하다못해 줄반장의 경험이라도 있는 사람에게는 가산점을 더 주겠다'하고 발표한다면 어떠한 변화가 올 것인가? 의대생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아마도 봉사 정신일 것이다. '우리 의대에서는 중, 고 시절에 봉사 활동에 뚜렷한 활동을 남긴 사람에게 가산점을 주겠다'하고 한다면 어떠한 변화가 올 것인가? 어문학 계열의 경우 필요한 것은 아마도 어문학 계열에 대한 소질과 능력일 것이다. '우리 영어영문학과에서는 전국 단위의 영어 학술 경시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한 학생에게 충분한 가산점을 주겠다,' '우리 국문학과의 경우 전국 단위의 백일장에서 입상한 학생들, 국어 논술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인 학생들에게는 충분한 가산점을 주겠다.' 만일 이러한 입학 사정의 기준을 발표한다면 어떤 변화가 올 것인가? 본고사를 보겠다고 고집하는 것만이 대학의 자율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학생 선발 방법을 다양화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적절한 학력의 유지는 물론 인성 교육의 핵심이 되는 여러 가지 요소를 다양하게 습득할 수 있도록 요구한다면, 아마도 우리 중, 고등 학교에서의 전인 교육은 혁신적인 성과를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액 과외니 비밀 과외니 하는 것도 사라지게 되고, 단순히 암기식 위주의 공부에 매달리는 전근대적인 학습 형태도 없어질 것이다. 마지못해 빗자루를 들던 학생들도 그것이 습관화됨으로써 봉사의 기쁨을 체득하게 될 것이 아닌가? 젊은이여, 봉사의 싹을 틔우라. 봉사가 어떻게 기쁨을 창출하는가를 몸소 체험해 보라. 그리하여 삶의 고귀한 가치가 봉사 정신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진리를 긍정하라. 그리고 그대의 삶이 넘치는 봉사의 희열 속에 열매 맺도록 최선을 다하라. 봉사는 삶의 기쁨이요, 보람 그 자체인 것이다. 젊은 시절에 마음껏 독서하라 독서는 인간의 폭을 넓힌다 학부모들께서 가끔 이런 질문을 하신다. "어떻게 하면 우리 집 아이가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국어 성적이 올라갈까요?" 이러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당황한다. 공부에는 왕도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요령은 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들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하고 설명을 해 드린다. 그분들이 끄떡끄떡 고갯짓을 하지만, 그러나 실상 그러한 것을 실천하는 것은 학생의 몫이지 어머니의 몫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의 설명은 항상 공허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겠지만, 먼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 인자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부모로부터 좋은 머리를 물려받았다면 그것만으로 벌써 남을 앞설 수 있으리라. 그런 점에서 우리의 자녀에게 "너는 누굴 닮아서 공부를 못 하니?"하고 꾸짖을 일이 아닌 것이다. 후천적으로 기를 수 있는 것, 그것은 아마도 정신력의 연마일 것이다. 뚜렷한 목표 의식 속에 해 내고 말겠다는 남다른 정신력을 발휘하는 학생, 그는 틀림없이 앞서 나아간다. '정신일도면 하사불성이라.(정신을 한 군데 쏟으면 어떤 일이든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정신력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 그것은 생활 습관일 것이다. 하루의 생활을 어떻게 학습과 연결시켜 꾸준하게 습관적으로 밀고 나가느냐 하는 점, 아침에 스스로 일어나고 밤중에 스스로 잠자리에 드는 학생, 그는 틀림없이 남보다 성적이 앞설 것이다. 이러한 여러 요소가 단숨에 형성되어지는 것은 아니리라. 그의 성품, 기질, 가정 환경, 부모와의 관계, 학교 생활, 선생님에게서 받는 영향 등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폭 넓게 적용되는 또 하나의 답변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많이 해 두라는 것이다. 독서를 많이 하는 것, 그것은 학업의 밑거름이다. 일상적인 삶에 익숙한 현대인이 특이한 체험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자신이 겪는 일상적 체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소설의 세계 속에 빠져 보면 우리는 많은 인간상을 만날 수 있다. 돈키호테도 만나고, 햄릿도 만나고, 드미트리도 만난다. 그리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성품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한 성품의 일단들이 내 마음에 스미게 된다. 우리가 소설을 통해 겪게 되는 특이한 체험, 그 속에서 인간을 보는 우리의 눈은 성장하고 이해의 폭도 확장되는 것이다. 독서는 그러한 면에서 인간을 살찌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소설 속의 세계에서 내 체험을 넓히고 나는 1950년대에 국민 학교를 다녔다. 그 어려웠던 시절에는 우리들이 읽을 만한 반반한 동화책 한 권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런 속에서도 우리는 독서에 대한 갈증을 풀기 위해 그저 무턱대고 아무 책이나 읽었던 기억이 난다. 5학년 때였던가. 우리 동네에는 창백한 안색과 슬픈 눈빛을 지닌 아주머니가 경영하는 책 대여실이 있었다. 돈을 받고 책을 빌려 주는 곳이었는데, 그 조그만 책 대여실에는 낡은 동화책과 헌 소설책으로 사면 벽이 가득 찼었다. 이 책 저 책을 구경하다가 무심코 나오려는 나에게 "그냥 가니?" 하고 안타깝게 물어 오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애처로워서 나는 얼른 눈에 띄는 동화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그 날 밤 그 책을 다 읽고서 나는 다시는 빌려 보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책을 돌려 주러 갔다. 하루를 더 보면 그만큼 돈을 더 내야 되니까 한 권을 하루만에 모두 읽는다는 것도 매우 힘겨웠다. 책을 반납하고 나오려는 내 뒷머리에 슬픈 눈빛을 가진 아주머니의 고운 목소리가 꽂혔다. "그냥 가니?" 나는 전기에 감전된 듯 그 자리에 서졌고, 다른 동화책을 꺼내들고 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기를 수십 일, 나는 드디어 책을 읽는 재미에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학교 수업 시간에도 소설책 겉장을 표지로 싸고 "국어"라고 써서 버젓이 책상 위에 내 놓고 열심히 읽었다. 그러다가 들켜 크게 혼난 적도 있었다. 집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단히 기특한 눈빛으로 나를 보셨다. 온밤을 지새우며 공부를 하는 외아들이니. 그렇게 소설책에 탐닉하다 보니 국민 학교 졸업할 때쯤 그 책 대여실에 있는 웬만한 책은 다 읽어 제친 듯했다. 처음에 내가 읽은 책들은 소년 소녀 소설류였다. "톰 소여의 모험" "15소년 표류기" "소공자" "소공녀" "로빗 훗" "플루타르크 영웅전" 등등의 많은 작품들을 읽어 나갔다. 그것이 어느 정도 끝나고 나자 나의 관심은 탐정 소설로 옮아 갔다. 루팡의 이야기는 온밤을 지새우는 데 충분했다. 샬록 홈즈 탐정의 이야기는 얼마나 흥미진진했던가? 우리 나라에도 장비호 탐정, 유불란 탐정을 다룬 소설책이 있다는 것도 그 때에 알았다. 탐정류에 이어서 내가 흥미를 느꼈던 것은 역사 소설 종류였다. 이광수, 김동인, 박종화 여러분들이 쓰신 역사 소설을 그 뜻도 잘 모르면서 열심히 읽어 나갔다. 이광수의 "세조대왕"을 읽으면서 나는 세조의 인간적인 면모에 연민의 정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수양대군 세조가 얼마나 잔혹하고 무지막지했던가를 배웠다. 많은 충신을 죽이고, 열두 살 어린 조카를 폐위시켜 마침내 살해하는 비정한 숙부 수양대군. 그 벌로 자손의 명이 단명하게 되고, 등창이 나서 결국은 비운에 죽어간 임금. 그렇게 우리는 배웠다. 그러나 소설 "세조대왕"을 읽으면서 나는 인간이 가지는 또 하나의 측면을 이해하게 되었다. 수양대군에게 어찌 세상을 다스려 보려는 포부가 없었겠는가? 그에 반해 이제 겨우 십여 세밖에 나지 못한 어린 조카가 임금이 되고, 자신을 철저하게 따돌린 중신들이 어린 임금을 조종하여 마음대로 정사를 주무르고, 이래서는 나라가 안정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수양대군의 궐기.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 그 속에서 겪어야 했던 수양대군의 내면적인 갈등. 소설 속에 다뤄진 수양대군의 인간적인 면모에 빠져들면서 나는 굉장한 혼돈에 싸였다. 학교에서 단종의 역사를 배울 때 오히려 수양대군을 두둔하는 발표를 했다가 뭇아이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연산군은 폭군이다. 그러나 "금산의 피"를 읽으면서 연산군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인간적인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체험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신문에 발표된 이야기를 그대로 믿지 않으려고 한다. 단 몇 줄로 '누가 어디서 무슨 일을 했다'라고 단정적으로 씌어진 그 글귀. 그러나 그 글귀에 나타나지 않은, 그 사람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가늠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사고 방식은 단순하지가 않다. 내 마음 나도 모를 때가 얼마나 많던가? 하물며 다른 사람의 일을 단순히 한 마디로 잘라 말한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역사 소설을 보면서 그러한 점을 깨우쳤다. 역사 소설을 어느 정도 섭렵한 뒤 나의 관심은 애정 소설류로 흘렀다. "마농 레스꼬"를 읽고 난 뒤의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고, 플라토닉 러브를 담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러다가 나는 세계 명작 소설류와 만나게 되었다. 세계 명작 소설은 쉽게 읽혀지지 않았다. 우선 그 지명과 인명이 생소하기 때문이었다. 도스토에프스키의 "죄와 벌"을 100여 페이지 읽다가 던져 버린 것은 아마도 중학교 시절인 듯싶다. 이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__코프' '__스키'하는 러시아식 인명이 한 줄을 차지하니 읽어 나가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안톤 체홉, 모파상, 오 헨리의 단편을 비롯해서 톨스토이, 도스토에프스키, 까뮈, 헤밍웨이 등등의 작품을 마구 읽어 나갔다. 그러한 독서의 갈증은 대학교 때까지 계속되었고, 나는 마치 쇠를 마구 먹어 치우는 불가사리처럼 많은 책을 읽어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남독의 방법이어서 독서의 좋은 방법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이제 와서 한 권 한 권 책의 내용을 떠올리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많은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내 인간의 부피를 크게 하고 깊이를 심화시켰다고 하는 것, 그 점에서 나는 항상 자부심을 갖는다. 영화에 미쳤던 소년 시절 나는 국민 학교 고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 영화에도 빠져 들었다. 5학년 때였을 것이다. 어느 아저씨가 나를 처음으로 극장에 데려 갔다. 눈 앞에 펼쳐진 대형 컬러 화면, 왕왕 울리는 스피커 소리, 그것은 눈이 번쩍 뜨이는 새로운 세계였다. 눈 앞에 현란하게 전개되는 칼싸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그 칼싸움 끝에 우리 편은 악당에게 칼을 겨눈다. 그 때에 나타난 하인이 두 사람이 형제임을 밝힌다. 분노하는 동생, 우리의 주인공은 적에게 향했던 칼을 거두어 무대 마루바닥에 집어 던진다. 바닥에 꽂힌 칼은 흔들흔들 치를 떨고 있다. 처음 보았던 그 영화의 장면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나중에 재상영되면서 알았지만 그 영화의 제목은 스튜어드 그랜져 주연의 "스칼라 무쉬"였다. 나는 영화에 미쳤다. 중, 고등 학교 시절 나는 내가 사는 지역의 몇 안 되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프로는 빠짐없이 다 보았다. 특히 시험 때가 되면, 매일같이 영화관에 가서 한 편의 영화를 보았다. 집에 돌아오면 저녁 먹을 때가 되었다. 한숨을 자고 밤을 새워 공부했다. 그 이튿날 학교에 가서, 밤을 새워 공부한 내용을 고스란히 쏟아놓고 나서는 또 영화관을 달려 갔다. 그것은 내게 굳어진 버릇이었다. 중, 고등 학교를 거치면서 내가 본 영화는 엄청난 양이었다. 그 때에는 미군 부대를 통해서 흘러나온 영화가 더빙도 되지 않은 채로 상여되곤 했었다. 원어로 나오는 것을 변사가 해설해 주던 시절이었다. 원어로 나오니 그 해석을 맡을 변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감상한 기막힌 영화들이 세월이 흐른 뒤에 한국말로 번역되어 개봉간에서 상영되곤 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작품, 올드 랭 사인의 슬픈 음악이 울려 퍼지면서 하나 둘 촛불이 꺼지고 그 촛불이 완전히 꺼짐과 동시에 입술을 포개는 두 주인공. "애수"라는 영화였다. 주연은 로버트 테일러, 비비안 리였다. 너무나도 사모했던 집시 여인. 그녀가 죽자 광란하는 노틀담의 곱추 카지모도. 죽은 집시 여인이 버려져 있는 동굴을 찾아가 그녀의 얼굴을 차마 쓰다듬지도 못한 채 그 옆에 다소곳이 누워서 함께 죽어가는 "노틀담의 곱추". 주연 안소니 퀸. 지나롤로브로지다. 나치 독일을 위하여 싸우는 독일 장교. 그러나 그 전쟁이 한갓 히틀러를 위한 놀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독일 장교. 그는 전쟁을 포기한 채 산을 헤맨다. 어느 산기슭 나무 그루터기. 그는 메고 있던 기관총을 박살낸다. 산중에 울려 퍼지는 그 소리를 듣고 수색하는 연합군. 그 연합군의 총에 독일 장교는 저격 당한다. 그의 머리가 진흙탕 속에 처박히고 몇 번인가 물방울을 토해낸 채 멈추어 간다. 마론 브란도 주연의 "젊은 사자들"이다. 게릴라를 포로로 잡은 독일 병사. 그들은 내일 아침이면 총살형이다. 전쟁을 혐오하는 독일 병사, 그들을 놓아준다. 탈출한 게릴라는 오히려 그 독일 병사를 향하여 총을 겨눈다. 총성과 더불어 고꾸라지는 독일 병사, 그의 품 안에서 한 통의 편지가 냇물에 떨궈진다. 그 편지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랑하는 아내의 편지였다. 잡으려고 애를 쓰는 독일 병사의 손끝. 그 손끝을 스치고 무심히 떠 내려가는 편지.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끝 장면이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영화를 본 탓일까? 대학 졸업 이후 나는 영화관을 별로 찾지 않았다. 옛날에 이미 다 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그 결말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가 대체로 짐작된다. 그러한 짐작이 가능한 것은 수많은 소설과 영화를 젊은 시절에 섭렵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을 통해 저절로 깨닫게 되는 사상의 흐름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대답할 것이다. "삼국지"라고. "삼국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원작자는 나관중이지만 김광주, 박종화, 이문열이 각기 번역한 "삼국지"가 따로 있다. 그 중에서도 다섯 권으로 되어 있는 김광주의 "삼국지"를 나는 가장 좋아한다. 고풍스런 옛멋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관우, 장비를 이끌고 제갈량을 삼고초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갈공명은 그 당시 나이 삼십이 채 되지 않은 백면 서생이었다.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은 제갈공명은 구세제민의 뜻을 펼치겠다고 결심한다. 그 때 제갈공명의 친우들이 그를 찾아와 만류한다. "여보게 공명, 우리는 자연과 벗하며 도를 닦아 왔네. 우리가 배운 도의 이치로 따져 보면 역사는 전쟁과 평화의 부단한 순환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 시대는 전쟁이 계속되는 시대일세. 아직은 전쟁이 평정될 시기가 아닐세. 자네가 세상에 나아가 구세제민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도로에 불과한 것일세. 오히려 세속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우리와 더불어, 이 순수무구한 자연과 벗하며 한 평생을 보내세." 그 때 제갈량이 이렇게 말한다. "나도 알고 있다. 지금은 평화의 시기가 아니라 전쟁의 시대라는 것을.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 전쟁의 시기를 평화의 시기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어찌하랴. 나는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을 배웠다. 내가 세상에 나아가 단 몇 천 명, 몇 만 명의 생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취해야 할 인간적 도리가 아니던가? 그러므로 나는 세상에 나아간다." 오장원에서, 이미 먼저 죽은 유비의 뜻을 풀어 드리지 못하고, 54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친 제갈공명, 그는 인간사를 고뇌했던 대단히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알베르 까뮈의 소설에 "페스트"가 있다. 실존주의 사상가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알베르 까뮈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방인"이라는 작품을 썼다. "이방인"에 이어서 그가 내놓은 것은 "페스트"였다. "페스트"는 부조리한 현실을 깨닫는 인간이 그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밝히고자 했던 작품이다. 알제리의 어느 도시, 차단된 그 도시에 페스트가 창궐하고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간다. 주인공 닥터 리유는 열심히 치료한다. 그러나 그의 치료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취재차 이 도시에 들렀다가 꼼짝달싹 못하게 된 신문 기자가 닥터 리유를 비웃으며 말한다. "당신의 의료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결국은 당신이 치료하는 모든 사람이 죽어 가지 않는가?" 그 질문에 리유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안다. 내가 아무리 치료한다 한들 그들의 목숨을 몇 시간 더 연장시킬 뿐, 결국 그들은 죽어 간다는 사실을 나도 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내가 배운 것은 의술이다. 내가 의술을 배운 한, 나는 내 환자들을 치료해 주어야 한다." 얼마나 인간적인 답변인가? 우리 인간은 본질을 따지기 이전에 인간이기 때문에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는 실존주의 철학 사상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밀림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슈바이처 박사는 이렇게 토로한다. "내가 인생을 바라보는 눈빛은 비관적이다. 그러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점에서 나는 대단히 의욕적이다." 이 글을 읽는 젊은이여, 생각해 보라.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의 출세의 변, 까뮈의 작품 "페스트"의 주인공 닥터 리유의 신념에 찬 목소리, 그리고 실존 인물인 슈바이처 박사의 말씀. 그것은 결국 똑같은 사상의 뿌리에서 분출된 것이 아니겠는가? 인생은 허무하다. 그러나 허무하다고 해서 눈감을 수만은 없다. 인생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불완전하다고 해서 스스로 좌절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인생은 허무하고 불완전하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인간의 삶을 개선해 나가야 하느냐 하는 점에서 우리는 더욱 의욕적이요, 오히려 그 속에서 생의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젊은이여, 그대가 바라보는 이 세상은 어떠한가? 별 것 아니던가? 회색빛이던가? 엉터리던가?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답해 보라. 그래, 바로 그것이다. 푸른 색으로 바꾸어야지. 신나는 세상으로 만들어야지. 가치 있는 세상으로 창조해야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그것이 바로 가치있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젊은 시절의 독서는 매우 소중하다. 독서는 바로 우리의 사고 능력을 키우고 인간의 폭을 넓게 만드는 자양분이다. 독서, 그것은 인간을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려 주는 귀한 작업인 것이다. 이제야 공개하는 사랑의 편지 나를 밝혀 준 사람, 명아 어느 날 밤늦게 집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울고 있었다. 그녀 앞에는 빛 바랜 편지 봉투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의아해서 물어 보았더니 그것은 바로 내가 그녀와 더불어 가슴앓이를 했던 젊은 시절, 그녀에게 보냈던 편지들이었다. 약 100여 통은 될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그 편지들을 간직해 왔을까? 신기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그녀는 그 편지들을 읽으면서 옛날 정취에 젖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한 편 읽어 보았다. 과연 그러한 젊은날의 고뇌와 열정과 사랑의 토로가 나에게도 있었던가?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남들은 우리를 꽤 닮은 부부라고 한다. 오누이 같다고도 한다. 그녀와 나는 동갑내기로 서로 알게 된 지 만 10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결혼에 골인했다. 고교 시절부터 시작해서 그 10년의 세월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긴 시간의 흐름이던가? 그 동안 우리는 가끔은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고, 때로는 치열한 불꽃으로 서로를 갈구하기도 했고, 또 어떤 때에는 이별을 생각하고 온밤을 흐느끼기도 했었다. 대학 시절 내가 병마에 시달려 생과 사의 기로를 헤맬 때, 그녀는 홀연히 내 생명의 파수꾼이 되어 어두운 죽음의 나락에서 나를 건져냈다. 내 젊은날은 반항과 몸부림과 처절한 도전의 연속이었던 것같다. 그러한 속에서도, 삶의 윤기를 느낄 수 있었고 생의 외경심과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녀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를 명아라고 불렀다. 명아 나를 밝혀 주는 사람, 나를 존재하게 하는 사람. 그녀와 결혼을 결심할 때쯤 해서 내 마음은 그녀가 부어 주는 사랑의 샘물로 충만해 있었고, 내 영혼은 사람의 희열 속에 떨고 있었다. 이제 내가 그 당시 그녀에게 주었던 한 통의 편지를 공개하고자 한다. 그대에게 바치는 사랑의 찬가 명아, 잠자리에 누웠으나 오늘 따라 잠이 오지 않습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지만 온 누리는 더욱 이 고요를 다할 뿐, 잠이 오지 않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일어나 앉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펜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당신에게 글이라도 써야 할까 봅니다. 나를 왜 사랑해요? 명아니까 사랑하지. 대답해 놓고 보니 그런 명답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게 사랑하는 이유를 묻기 전에, 명아여! 당신의 이름을 말하십시오. 가슴 가득히 출렁여 넘치는 정겨움은 명아, 당신으로 하여 얻은 사랑의 기쁨. 명아, 당신은 부드럽고 포근합니다. 당신은 은은하고 따뜻합니다. 당신은 물 먹은 장미처럼 충만하고 싱싱합니다. 그 모든 것,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미덕은 나에게는 금싸라기처럼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 자체로 소중할 뿐, 내 사랑의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은 명아, 이 세상에 오직 하나 존재하는 명아이기 때문입니다. 명아, 사랑은 감정과 이성을 총화한 전일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이유는 많은 갈래를 가지고 있지마는, 결국 너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말 한 마디에 귀착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마법에 빠진 자는 사랑에서 오는 곤욕을 즐겁게 참으며, 사랑을 위해 달갑게 크나큰 희생을 치르며, 사랑의 기적을 경이롭게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사랑이 증명하지 않습니까? 명아, 사랑하는 명아, 내가 퇴원한 지도 20여 일이 넘었습니다마는, 고요히 눈을 감으면 입원시의 가지가지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뼈를 깎던 명아의 슬픔.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 생과 사의 기로에서 허덕이던 몰골. 단절된 상황 속에서 안으로 파고 드는 서러움을 홀로 추스리던 외로움. 명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던 내가 어쩌면 그렇게도 빨리 회복할 수 있었던가를. 사랑하는 명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때 당신이 겪은 온갖 고초는 너무도 큰 시련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진땀이 납니다. 그러나 아, 내 사람이여, 당신은 굳건히 이겨냈습니다. 당신은 기적을 낳았습니다. 명아, 나는 당신에게 머리를 숙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해서도 아닙니다. 내가 당신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은, 당신은 너무도 위대한 사랑의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마치 당신은 구도자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당신, 당신의 사랑을 생각하면 기쁨을 지나 차라리 숙연해지는 기분입니다. 당신의 성실한 사랑에 나는 어떻게 보답해야 합니까? 명아, 한참을 펜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내게 선사한 자그마한 반지에 가만히 입술을 대어 봅니다. 당신의 그리운 냄새가 풍겨 나오는 듯합니다. 명아, 이제 우리의 시련은 끝난 것입니까? 백병원 215호실, 서울대학병원 서7-3호실. 끝없는 기침, 묻어 나오는 노란 가래침, 핏빛 오줌, 온통 내 혼을 앗아갔던 고통의 밤들. 끝없이 이어지는 당신의 울음, 삶과 죽음, 죽음과 삶. 사랑하는 나의 명아, 크나큰 설움을 안으로만 가득 채운 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나가던 당신의 물기 젖은 눈빛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당신은 위대하였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는 힘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사랑을 시험하신 하느님께 우리의 뜨거운 사랑을 보임으로써 하느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나는 우리에게 시련을 내려 준 하느님의 뜻에 감사합니다. 우리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주신 하느님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이제 신이 우리에게 내려 줄 박수를 기다리며 축복의 시간을 맞이할 준비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운명의 앞날이 우리 앞에 펼쳐질지라도 우리는 이겨 낼 자신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역경을 행복으로 바꿀 줄 아는 지혜가 있고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의 확신은 폭풍우 속에서도 안온하고, 풍랑 속에서도 행복합니다. 우리는 이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보람을 확인하는 축복된 인생을 펼쳐 나갈 것입니다. 명아, 그 모든 확신은 당신이 나에게 준 것입니다. 이제 밤도 깊었습니다. 밤이 깊어가면 깊어갈수록 내 의식은 더욱 또렷해지는 듯합니다. 지나간 나의 삶,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당신과 나의 삶, 이 온밤을 하얗게 새우며 그것을 그림하여 보려 합니다. 명아, 항상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살아 나를 밝혀 주는 명아, 안녕히. 1986년 5월 1일 자정에 평생 동안 읽고 읽을 사랑의 편지 30년 가까운 아득한 옛날의 내 편지. 그 편지를 지금 다시 읽으니 왠지 쑥스럽고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로 그 당시 내 가슴에 들끓었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가슴 뿌듯하게도 느껴진다. 명아여, 그대와 내가 한 가정을 이루고 아들 딸 낳아 키우면서 살아오기 벌써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대와 나는 1950년대 말에 서로 알게 되었고, 그 이후 부침하는 삶의 행로 속에서도 용케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서로 잡아당겨 드디어 부부되어 해로해 가고 있다. 그대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아마도 사랑은 서로의 모습을 훑어 눈빛으로 왔을 것이다. 그러나 연륜이 쌓이면서 우리들의 사랑은, 마음을 열고 영혼을 열고 종국에는 너와 나의 모든 것을 샅샅이 훑어, 너의 단점도 나의 단점도 다 감싸 안는 넉넉한 샘물이 된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우리들의 사랑은 재에 덮인 숯불처럼 은은하게 오래도록 빛과 열을 발할 것이다. 나의 명아여, 우리의 삶은 항상 충만된 사랑 속에 영속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삶 속에서 건조함을 느끼고 섭섭함을 느낀다면, 우리는 켜켜이 먼지 쌓인 우리의 옛 사랑의 서신을 다시 꺼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젊은날의 사랑의 불꽃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으리라. 평생을 밝혀 줄 나의 명아여. 제3부 살아있는 정신을 위하여 화살과 노래 롱 펠로우 나는 허공으로 화살을 하나 날렸네. 어디쯤 떨어졌는지 짐작은 하지만 그곳이 바로 어딘지는 알지 못했네. 그 화살은 너무도 빨라 내 시선이 미처 쫓아갈 수가 없었다네. 나는 허공으로 노래를 하나 띄웠네. 어디쯤 날아갔는지 짐작은 하지만 그곳이 바로 어딘지는 알지 못했네. 제 아무리 좋은 시선도 그 누가 노래의 날림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멀고 먼 훗날 나는 부러지지 않고 참나무에 박힌 나의 화살과 한 친구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나의 노래를 발견했다네. 젊은이여, 이젠 우리도 비상하자 꽃을 먼저 피우는 자연의 의지 삼월엔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저 길둑을 감돌아 흐르는 실개천의 음지에서도 얼음장은 말갛게 녹아 내리고, 청랑한 물소리에 묻어 봄이 오고 있다. 우울한 도시를 온통 화사하게 채색해 줄 노오란 개나리 움 속에 봄은 숨어 있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목련의 하아얀 꽃망울 속에서 봄은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봄엔 들판으로 나가고 싶다. 휘파람이라도 불며 공연히 바쁜 듯 거리라도 거닐고 싶다. 모든 것이 새로운 생명이듯 눈부신데, 우리 시대를 사는 젊은이여, 우리도 이젠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고 새롭게 시작해 보자꾸나. 이봄에, 개나리는 어째서 샛노란 꽃부터 피우는 것일까? 긴 겨울의 망각의 시간을 넘어 봄이 올라치면, 물오른 개나리는 서둘러 꽃잎을 터뜨린다. 여기저기서 싱싱하게 울려 퍼지는 노오란 개나리의 합창 합창들. 그 합창이 사위어갈 때쯤이야 무성하게 돋아나는 개나리의 푸르른 잎사귀. 신비롭다. 꽃부터 피우기는 목련도 마찬가지다. 겨울의 인내를 배운 저 목련나무에 비상을 예비하여 하늘로 날아오를 듯 피어난 하이얀 꽃망울. 그 꽃망울이 벌어져 계절을 찬미하고 나면 뒤이어 돋아나는 푸르른 잎사귀. 젊은이여, 무슨 뜻일까? 봄을 이끌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개나리 목련이 꽃부터 피운 뒤에야 잎사귀가 돋아나는 그 신비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인내를 배운 자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보상의 꽃일까? 아니면, 꺾이지 않는 의지가 피워 낸 처절한 생의 결실인가? 내가 가꾸는 삶 젊음은 인생의 봄이다. 그러기에 젊음은 싱그럽다. 젊은이가 가진 건강한 피부, 풋풋한 미소, 반짝이는 눈동자, 그것은 신의 축복이다. 그러나 젊음은 단순히 생리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젊음은 감동이고, 정열이고, 행동이고, 결단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감동할 줄 모르는 아이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뜨거운 가슴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젊은이여 무릇 완성을 지향하기에, 자신이 지향할 미지의 세계에 대한 꿈을 지녀야 한다. 어렴풋하게나마 자신의 앞날을 예감하며 현실을 부단히 다져 나가는 생동감 있는 삶을 젊은이는 가져야 한다. 그러나 젊은이여, 반성해 보자. 우리는 혹시 쳇바퀴 돌리듯 하는 삶 속에서 피동적으로 이끌려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혹시 모범생이란 덫에 걸려 우리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생의 불꽃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물론 공부한다. '__해라'라는 격려보다는 '__하지 말아라'라는 금기의 사항들을 너무 많이 지시 받고 그것에 매달려 행동하는 데에 길들여진 젊은이들. 진학을 위한 안간힘 속에 자율적 의지가 아닌 자율 학습을 밤늦게까지 받아야 하는 젊은이들. 그래서 어쩌다 이른 시간에 교문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좋을지 방향 감각마저 상실해 버리는 젊은이들. 학교와 집을 잇는 단순 통로 이외에는 다른 거리를 익숙하게 다녀보지 못한 시야 좁은 젊은이들. 한 교실 안에서도 서로 대화 한 번 나눠 보지 못한 급우가 있고, 어쩌면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한 반 급우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가슴 좁은 젊은이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온실의 꽃이기를 부모도 선생도 철저하게 강요한다. 그러면서도 양처럼 순종하며 자라나는 우리 젊은이들을 패기 없다고, 이기적이라고, 피동적이며 타율적이라고 매도한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울 안에 꽁꽁 가둬두고 부모님 선생님 뜻대로 키우면서 왜 가지가 삐뚤어졌느냐, 왜 잎사귀 색깔은 누렇게 됐느냐, 옆 나무와 대화 좀 해라 성화를 부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의 옛 고등 학교 시절이 유난히도 그리워진다. 5교시의 무거운 수업 분위기. 눈은 자꾸 감기는데, 교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갑자기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제군들, 공부하느라고 수고한다. 지금 세기의 대결이라는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권투 시합이 시작되어 중계되고 있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우리는 권투 방송을 듣는다. 수업하시는 선생님들, 미안합니다..." 이어서 울려 퍼지는 왁자지껄한 소리. '땡!' 공이 울리고 '원, 투!', '원, 투!' 중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숨 넘어갈듯 교실 안을 압도한다. 어디 잠이 와? 눈이 번쩍 뜨인 급우들은 모두 환성을 지른다. 온 학교가 그대로 실내 체육관이 된다. 그날 알리가 2회에 K.O로 이겼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눈이 소담스레 내리는 교정은 한껏 고즈넉하고, 선생님의 강의 목소리는 아련히 환청으로 들리는 것 같은데, 순간 스피커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들, 수업 중 미안합니다. 전교생은 지금 곧 운동장으로 집합하기 바랍니다."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영문을 모르는 채 전교생은 눈이 발목까지 올라오는 운동장에 정렬했다. 교장 선생님은 입을 열었다. "눈이 오는데 어찌 교실에만 있을 수 있나? 지금부터 선생님 대 학생들간의 눈싸움을 시작한다. 제군들은 평소에 불만이 있었거든 이 기회에 풀라!" 난장판이 벌어졌다. 선생님들은 저항 한 번 못 해 보고 눈사람이 되었다. 선생님 중 한 분이 외치셨다. "너희들 정말 날 미워하니?" '아 선생님. 사실은 미워했는데 그 말씀을 들으니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뭉쳐진 눈덩이가 담장 옆 나무로 향했다. 젊은이여, 우리는 가끔 파격을 원한다. 갇혀진 삶 속에서도, 강요되는 규범 속에서도, 적절하게 가슴을 풀어 놓을 사건을 원한다. 그것까지를 포용하여 계획하는 것이 전인으로 키우는 교육이 아닐까? 젊은이여, 우리의 눈을 크게 뜨자. 가끔은 매섭게 가끔은 뜨겁게, 나의 주변을 비판하고 사랑하자. 피동적 삶보다는 주체적 의지 속에 내가 하자. 끌려 가지 말고 내가 앞장서서 끌고 가자. '공부를 하란다'가 아니라 '내가 공부한다'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한 적극적, 긍정적 삶 속에서만이 우리는 크게 푸르게 성장할 수 있다. 공부란 무엇인가 젊은이여, 공부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공부는 바로 너희들의 생활이다. 그러기에 너희를 '학생'이라고 지칭한다. 공부하기 싫다면, 그것을 생활로 삼기 싫다면, 생활 전선에 나서려무나. 그래야 네 삶을 스스로 꾸려 나갈 수 있다. 부모가 책임을 지고 너희들의 삶을 보살피는 것은 너희들은 생활력이 없이 다만 공부라는 것을 소홀하고 가족 부양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너희는 부모를 비판하겠지. 그렇다. 그렇다면 공부에 열중하지 않는 너희들도 부모에게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왜냐 하면 너희는 너희들이 해야 하는 생활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부모를 비판하면서 너희만 위해 달라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책임져야 되기 때문이다. 그래, 안다. 생활에 충실하고 싶어도 공부가 잘 안된다는 말이지? 생각해 보자. 공부란 무엇인가? 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조상이, 우리의 선배가 일구어 놓은 모든 삶의 조직적 집합체다. 너희가 더 많이 더 높이 이것을 흡수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너희의 시대를 더 좋은 사회로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공부란 모래알같이 무미건조한 글자의 익힘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삶의 본체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얼마나 의미 있고 가슴 뛰는 일인가? 그런 것을 아는데도 공부가 잘 안된다고? 그것은 너의 '마음'을 온전히 그곳에 쏟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부재언이면 시이불견하며 청이불문하며 식이부지기미니라. 마음이 그곳에 있지 아니하면, 보되 보이지 아니하고, 듣되 들리지 아니하고, 먹되 그 맛을 모르느니라.' 그렇단다. 마음이 없는데 무슨 감각이 있으랴. 공부를 잘 하는 비결은 첫째, 다름 아닌 '마음 쏟음'에 있는 것이다. 책을 잡을 때 마음을 비우라. 주변의 걱정도, 신경 쓰임도, 떠오르는 누구의 얼굴도 모두 지우라. 그리고 책의 문맥이 주는 의미 속에 너의 마음을 흐르게 하라. 그것이 바로 집중이라는 것이다. 공부에 집중되면 너는 25시를 살 수 있다. 공부 싸움이 시간 싸움이라면, 양이나 채우는 공부보다는 질을 높이는 공부 방법을 택하라. 집중하는 공부야말로 질 높은 공부이며, 그것은 남이 2시간 공부하는 양을 1시간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 마음이 잡혔느냐? 이제 공부하는 두 번째 단계는 '감각'을 동원하는 데 있다. 읽기는 읽었는데 이해가 안된다는 사람이 있다. 이해란 무엇일까? 이해의 초기 단계는 감각으로 익히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배운다고 해 보자. 하나의 사건은 필연적 원인을 수반한다. 그것이 삶의 형태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시기의 조선, 중국, 일본의 국내 사정, 서로간의 국제 관계, 특히 그 당시 조선의 무사안일한 정치 행태와 사회 구조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이 원인으로, 저것이 근인으로 작용하여 전쟁이 터진 것을 알 수 있다. 자, 전쟁이 터졌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쳐 올라오는 적의 기세, 대처할 방법이 막연한 조정, 백성들의 원망, 자구책을 세우는 의병, 숨막히는 외교 전략, 신 립의 패전, 임금의 몽진, 이순신의 등장, 전쟁의 소용돌이는 칠 년이란 세월을 휘감는다. 드디어 노량 해전에서의 마지막 싸움. 달밤에 튀는 피, 비명 소리, 불타는 배, 독전하는 장군의 비장한 모습, 날아드는 화살, 쓰러지는 장군, 패주하는 적, 아침 햇살이 퍼지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는 우리의 장한 군사, 그러나 장군의 죽음이 알려지자 통곡하는 바다, 바다 아직도 핏물은 흐르는데. 너의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을 온통 동원하여 그 싸움의 모습을 상상하라. 감각의 동원은 이해를 높인다. 싸움이 끝난 뒷처리가 어떻게 되었을까? 네가 주체가 되어 상상해 모라. 삼국의 외교 관계,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 변화, 그리고 백성의 구호를 위해 설립된 기관들. 그렇게 한 사건의 흐름에 따라 원인, 경과, 결과를 상상하고, 감각적으로 느껴본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해의 첫걸음은 감각의 동원에 있다는 것을 알라. 항상 새롭게 다지는 결심 젊은이여, 우리는 우리의 생활인 공부에 대해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공부에 압도당하는 딱한 너희들을 위해 나의 생각을 피력한 것이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다. 한 번 결심하면 삼일밖에는 가지 못한다는 비웃음의 표현이다. 그러나 한 번 결심해서 삼 일이라도 잘 지켜질 수 있다면, 평범한 우리로서야 얼마나 다행인가? 결심을 해도 잘 지켜지지 않는가? 걱정하지 마라. 한 번 결심해서 삼 일만 유지하라. 그리고 효력이 떨어지면 다시 결심하라. 작심삼일. 한 번 결심하여 삼 일만 갈 수 있다면, 젊은이여, 1년에 100번만 결심하라. 그르면 평범한 우리도 너끈히 우리의 결심을 1년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이여, 나는 '깨어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나 항상 죽으리라. 하여 매일 새로 태어나리라." 그렇다. 젊은이여, 우리를 매일 죽이자. 내 속에 들끓는 이기심, 시기심, 나태함 등을 매일 죽이자. 그리고 매일을 항상 새롭게 시작하자.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묵상하라. "오늘도 내 삶이 새로 태어난 것을 깨닫게 하소서. 어제의 나를 거부하게 하시고 새로운 나를 인식하게 하소서. 하여 매일 매일을 눈부시게 살 수 있도록 하소서." 끝없는 자아 확인 속에 우리의 삶은 영근다. 실패도 있다. 좌절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새롭게 일어나 나아간다. 오늘의 나는 이미 어제의 내가 아니다. 이 봄에, 샛노란 개나리 꽃잎의 치열함 속에, 목련의 하이얀 비상의 몸짓 속에, 젊은이여, 이젠 우리도 비상하자꾸나. 살아 있는 정신 깨어 있는 의식의 삶을 위하여 "인간은 과연 얼마를 살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측면의 물음이 아니다. 인간의 삶 속에서, 깨어 있는 의식 속에 치열하게 삶을 누리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사색적 물음이다. 인간의 삶을 자고로 '인생칠십고래희'라고 일컬어 오지만, 현대인의 수명은 과학과 의술의 발달로 이제는 능히 칠십세를 더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 그러면 깨어 있는 의식의 삶, 무엇인가 치열한 목적 의식 속에 맹렬히 삶을 연소할 수 있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 산술적으로 풀어 보자. 물론 이 계산은 나의 주관에 의한 것임을 밝혀 둔다. 나는 인간의 삶을 둘로 나누어 준비하는 삶(제1기), 그리고 이루어 가는 삶(제2기)으로 파악하고 싶다. 제1기의 삶이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성인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삶을 이른다. 이 삶은 대체로 교육을 받는 시기이다. 인간을 배우고 사회를 배우고 학문을 배워서, 장차 스스로 사회 일원으로서 참여하여 살아갈 힘을 기르는 시기다. 물론 개인에 따라 차이는 나겠지만. 나이 30세까지를 제1기 준비하는 삶으로 생각해 보자. 제2기의 삶은 이루어 가는 삶이다. 완전한 성인으로서 개인. 사회. 국가에 대해 권리와 의무를 함께 져야 하는 책임 있는 삶의 시기다. 가족을 부양하며 자신이 선택한 일에 몰두하여 자아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70생애 중 깨어 있는 의식 속에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많아야 12년 그렇다면 깨어 있는 의식, 치열한 삶의 형성은 자연히 제2기의 삶과 연결된다. 제2기의 삶 40년. 그 가운데에 진정한 생의 의미를 추구하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하루의 삶을 대체로 계산해 보면, 수면 시간 3분의 1, 일상적 생활의 시간(식사, 휴식, 취미, 오락, 담소 등)이 3분의 1. 그러니까 정작 일다운 일을 하는 시간은 하루에 기껏해야 8시간 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이렇게 계산하면 인생 칠십 중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은 줄잡아 12년. 이 단순한 산술적 계산에는 억지가 따를 수 있겠지만, 결국 우리가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 투자하는 시간은 70생애 중에 12년간이라는 수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왜 사는가? 이 물음은 삶을 영위하는, 그리고 사고하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은 생각하는 것, 그리고 많은 철학자가 나름대로 이에 대한 갖가지 대답을 한 것도 사실이다. 왜 사는가? 이 물음은 범상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우 무겁고 어렵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이해, 준비의 삶을 살아가는 젊은 여러분은 꼭 한 번 음미해 보아야 하는 물음이 아니겠는가? 알피니스트는 대답한다. "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나는 산에 오른다." 시지프스는 말한다. "이 무거운 바위돌을 저 산 정상에 올려 놓아야 하기에, 나는 이 순간에도 바위를 굴린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라는 항로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금전인가? 학문인가? 명예인가? 아니면 종교인가? 이러한 물음으로 하여 나 또한 고뇌의 고교 시절 한때를 보낸바 있지만, 지금도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왜냐 하면 내가 관여하는 것은 단지 내 작은 몫의 삶뿐이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내 삶조차 휘청거리기 일쑤이거늘 어찌 거대한 보편적 삶의 문제를 운위할 수 있으랴?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각자의 삶의 몫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미 부여는 해야 한다. '나는 이것 때문에, 이렇게 하기 위해서 산다.'라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삭막하랴? 그리고 내 삶이 마감할 때까지 하루 세 끼 먹어 없애는 수많은 음식물의 의미를 어찌 설명할 수 있으랴? 생의 전개 속에 몇 번의 수정이 가해지는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도 삶을 준비하는 젊은 여러분의 나이에. 살아 있는 정신을 위하여 살아 있는 정신을 위하여 이 말은 독일의 모 대학 정문에 걸려있는 현판의 글귀이다. 살아 있는 정신, 얼마나 좋은 말인가? 자연과 인생의 본질을 탐구하는 정신, 고뇌하고 노력하고 희열에 싸이는 정신, 개인과 사회와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성찰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하여 하나의 자그마한 조약돌이라도 인간 삶의 축적된 돌무지에 얹으려는 정신, 얼마나 좋은 말인가? 인간의 본성은 본디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하는 논쟁에 나는 쉽게 끼어들지 못한다. 소위 성선설과 성악설의 정반대 주장 속에 나는 어정쩡할 따름이다. 그러나 한 가지 믿는 것이 있다면, 존재론적 입장에서의 인간이 어떠하든, 인간은 선의지를 지향해야 하는 당위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그러면 못 써', '이렇게 행동해야 해'하는 일반적 표현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할, 즉 선의지를 향해 살아나가야 할 행동 규범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러한 선의지의 결실을 '보람'이라고 말한다. 선의지의 발현 속에 얻어지는 '보람'의 마음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생을 값지다고 느끼게 하는 핵심이며,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소이리라. 나의 하는 일이 나 자신에게 떳떳하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면 그것이 바로 선의지를 담은 보람된 일이 아니겠는가? 철공장에서 하나의 부속품을 깎는 일, 작은 뜨락에 나팔꽃을 심는 일, 들판에 땀을 쏟아 한 톨의 벼이삭을 생산하는 일, 골목마다 넘쳐나는 쓰레기를 치우는 일, 주차장에서 열심히 세차하는 일 그러한 일들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뿌듯한 보람을 느낄 수 있다. 문제는 내 하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하는 자신만큼은 그 일에 대한 애착과 긍지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애착과 긍지는 '보람'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진로 선택은 직업을 잉태하고 직업은 보람의 바로미터 제2기(대체로 30세 이후)의 삶을 사는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준비의 삶(제1기)을 사는 동안 받았던 많은 것들을 후대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도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을 '직업'이라고 한다.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의 기준은 각자의 능력과 환경과 정서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가지 공통되는 것은 평생을 통해 종사하는 직업에서 각자 나름대로의 '보람'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 시대 젊은이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고, 아마도 생을 마칠 때까지 '국어'에서 멀어질 수 없으리라. 그렇게 된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사범 대학 국어과를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학과를 나왔느냐가 곧 직업과 결부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학과의 선택은 그의 평생 진로를 좌우하게 된다. '교육'과 '국어' 속에 내 삶이 영위될 것이라는 예감은 바로 내가 국어과를 졸업하고 또한 교육자의 길을 선택했다는 데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내 일상적 삶은 남들과 다름 없는 평범 속에 이어지겠지만, 내 삶의 보람은 '교육'과 '국어',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 놓인 '출판'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 삶의 특이성인 것이다. 이러한 내 삶의 특이성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면, 내 인생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 따라서 나는 평범한 내 삶 속에서도 나를 반짝이게 해 줄 수 있는 나만의 보람을 찾아 매진해야 할 것이다. 준비의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있어 학과의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그 선택된 학과가 대체로 직업으로 이어지고, 그 직업은 바로 자신의 자아 실현, 즉 '보람'의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여 생명의 불꽃을 남김없이 불사르리라 구두닦이 소년의 성공담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나이 60에 고교 입사 검정 고시에 합격한 할머니의 이야기가 우리를 감동시킨다. 갱 속에 갇힌 지 45일만에 드디어 구출된 어느 광부의 끈질긴 생명력에 우리는 외경심마저 가지게 된다. 소녀 가장의 몸으로 병든 할머니를 간호하면서 어린 네 동생을 꿋꿋하게 기르고 있는 소녀의 이야기는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감동적인 삶, 그것은 그 삶의 특이성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가는 평범한 삶, 그 삶을 압도하는 개성적인 삶이기에 우리는 감동하는 것이다.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의 일회성 속에서, 살아있는 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응시하며 강인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는 항상 아름답다. 이미 부여받은 생을 긍정하고, 그 삶의 꽃을 피우기 위해 한 방울 열정의 기름마저 불사르는 뜨거운 혼. 그리하여 그 결실이 선의지의 '보람'으로 자신에게 또 남에게 인식될 때, 우리의 삶은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우리가 먼 훗날 생을 되돌아 볼 때 떳떳하게 술회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 삶에 후회는 없다. 나도 남들처럼 먹고 마시고 불평하고 사랑했지만 나에게 주어진 삶의 길, 내가 선택한 생의 행로에서 나는 회한 없는 삶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정신으로 내 몫의 생명의 불꽃을 남김없이 불살랐다. 이제 내가 남길 수 있는 말은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준비의 삶'을 알차게 일궈 보람찬 삶을 이루도록 젊음은 힘이 있어 좋다. 젊음은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어 좋다. 그리고 젊음은, 펼쳐질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고뇌할 수 있어 좋다. 이 젊음의 시기에, 삶이란 무엇이며,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해 사색했으면 한다. 그것이 비록 소박한 해답에 그칠지라도, 아니 전혀 답조차 찾아낼 수 없다 할지라도 젊음은 반드시 이러한 본질적 문제에 대해 한 번쯤 고뇌의 자국을 남겨야 할 시기다. 그리하여 어렴풋하게나마 자신의 장래의 삶을 예견하고, 그 완성을 위해 오늘을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일상적인 삶으로 하루 24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특이한 삶, 자신만의 치열한 체험 속에서 '이루어 가는 삶(제2기)'을 위한 '준비의 삶(제1기)'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한 가지 명심해야 될 것은 그러한 삶의 특이성은 깨어 있는 의식, 살아 있는 정신 속에서 발아한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정신 그것은 생의 보람을 영글게 하는 비료인 것이다. 네 의식의 성장을 위하여 의식이 성숙해야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른이 되는 것 그것은 단순히 신체적 성장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이 어른스러워졌을 때, 우리는 명실공히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른스럽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른스럽다'는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빛이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물 속에 내재한 의미를 헤아리고 판단하는 사고 작용에 대한 평가가 아닐까? 우리는 흔히 '좋다', '나쁘다'라는 말을 아주 쉽게 한다. '옳다', '그르다'란 말도 깊숙한 헤아림 없이 마구 내뱉는다. 과연 그럴까? 내 주관적 판단에 의한 것이 그대로 진리가 되고 거짓이 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자라나는 젊은 세대는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의식의 성장이 빠르면 빠를수록, 이 세상의 모든 일과 사물을 조화 있게 관찰하고 좀더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가 좀더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진지함이라고 나는 믿는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으로 모든 것을 속단 말라 고3 자율 학습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든다. 밤 9시가 넘어서 교문을 나설라치면 휑하니 밀려드는 허전함에 몸이 졸아드는 느낌을 받는다. 어깨에 멘 가방이 오늘따라 무겁다. 버스에서 시달리며 집에 도착하면 11시가 넘는다. 캄캄한 대문 앞에 서서 우리는 마치 이방인인 듯 잠시 머뭇거린다. "딩동딩동!" 초인종을 누른다. 어서 방에 들어가 쓰러져 눕고 싶다. 그러나 기척이 없다.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누른다. "딩동딩동!" 신경질적으로 울리는 그 소리가 우리를 더욱 경직되게 만든다. 그래도 기척이 없다. 속에서 울화가 치민다. '이게 뭐야? 나는 밤늦게 공부하고 돌아오는데, 아무도 맞아주는 사람이 없다니...' 오늘따라 엄마가 야속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잠이 덜 깬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거칠게 방으로 들어간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엄마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자, 우리는 하나의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기운이 다 빠져 파김치가 되어서 돌아온 우리를 엄마는 섭섭하게 맞아주었다. 엄마는 나에게 무관심하다.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러나 젊은이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엄마는 나를 위해 새벽같이 일어난다. 내가 아침 6시에 눈을 뜬다면, 엄마는 5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한다. 그리고 나를 위한 도시락을 두개씩이나 싼다. 어서어서 준비하라고 성화를 부리시는 엄마. 나를 내보내고 나서도 통학길에 오르는 동생을 위해, 출근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아침마다 전쟁하는 우리 엄마. 낮 시간을 그냥 쉬면서 보내셨을 리가 없다. 그렇게 하루 해를 보내고 내가 돌아올 때쯤이면 그 늦은 밤에도 새롭게 저녁 식탁을 준비하시는 엄마. 그리고 나 혼자 공부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뜨게질거리를 들고 내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조시면서도 1시까지 함께 있어 주는 엄마. 그 엄마가 피곤을 이기지 못해 잠깐 잠이 들어서 내가 누르는 초인종 소리를 못 들었다고 해서 관심 없는 엄마일까? 신경질이 난다고 퉁명스럽게 내뱉은 내 말에 엄마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이나 아닐까? "매일 늦게 오는 나 때문에 피곤하시지요? 조금 더 주무시게 해 드릴 걸... 엄마 미안해요." 그렇게 따뜻하게 위로해 드렸다면, 엄마는 얼마나 고마워하셨을까? 그리고 자식을 키운다는 보람으로 새로운 힘이 나셨겠지. 그런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행동은 충동적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렇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너무 피곤했기 때문일까? 폭 넓은 관찰 속에 확고한 주관이 선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거죽과 속이 있다. 즉, 표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깊이는 묻어둔 채 거죽만 가지고 판단하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사물의 진실에 접근하는 자세가 아닐 것이다. 어릴 때 본 어느 서부 영화가 생각난다. 백인과의 협정 하에 보호 구역에서 생활하던 인디언들은 계속되는 백인들의 횡포에 끝내 전쟁을 택하게 된다. 인디언 추장인 시팅불은 전사들을 이끌고 나아가면서 뉘엿뉘엿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최후의 독백을 한다. "이 땅은 조상 대대로 우리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백인들이 나타나 우리를 내몰았다. 이제 우린 우리의 발을 붙일 땅 한 평조차 없다.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최후의 싸움을 시도한다. 아! 정의란 어디에 있는가?" 늙은 추장의 그늘진 얼굴에 짙은 우수가 깃든 그 장면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과연 정의는 무엇인가? 서부의 개척사를 찬란히 장식한 백인들의 무자비한 정복이 정의일까? 쫓기고 쫓기면서 짐승처럼 몸부림치는 인디언들의 처절한 생존의 모습이 정의인가? 끈질긴 투쟁 끝에 드디어 독립된 국가로 승인 받게 된 팔레스타인은, 2차 대전 후 유태인에게 그들의 땅을 빼앗기고 유랑하는 민족이 되었었다. 세계 곳곳에서 몸서리치는 테러를 행하여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팔레스타인. 몇 년 전,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 의장이 행한 연설은 우리의 가슴을 친다. "전세계 인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2,000년의 유구한 세월 동안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2,000년 후 갑자기 나타난 그들은 이 땅이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며 우리를 총칼의 힘으로 내쫓았습니다. 이 땅은 누구의 땅입니까? 2,000년을 살아온 우리의 땅입니까? 2,000년 전에 살았다는 그들의 땅입니까?" 나는 여기서 백인이, 또는 이스라엘 민족이 나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건의 진상은 어느 한 면만 보고서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물을 뒤집어 보라. 그 속에 또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치신 여러 선열들. 그분들의 행적을 당사자인 일제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셨던 윤봉길 의사, 일본 천황을 저격하려다 실패하신 이봉창 의사. 그분들은 목숨을 던져 내 나라 주권을 되찾으려 하신 민족의 귀감이시다. 우리의 존경에 반하여 일제는 그분들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테러리스트로서 낙인 찍지 않았을까? 민족이 처한 상황에 따라 서로 상반된 견해를 표명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한 폭 넓은 관찰 속에 우리의 확고한 주관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식을 성장시키는 길인 것이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삶은 조상의 피눈물의 결실 제주도 그곳은 꿈의 섬이었다. 낮게 드리워진 청정한 하늘, 야자수로 정돈된 깨끗한 거리, 마음마저 샛노랗게 채색하는 유채꽃의 장관, 잘 다듬어진 밭과 밭 사이의 돌담 돌담들, 초록빛보다도 더 투명한 바닷물, 신기하게 들리는 제주도 사투리. 이국적 정취에 흠씬 젖을 수 있는 제주도가 내 땅이라는 것은 신의 축복처럼 여겨졌다. '삼무삼다'의 섬. 제주도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삼무 문과 거지와 도둑이 없다. 삼다 바람과 돌과 여인이 많다. 곳곳에 구멍 숭숭 뚫린 시커먼 화산석으로 아담스레 담을 쌓아 밭과 밭의 경계를 만든 시정어린 풍물을 바라보면서, 박물관에 들러 제주도의 습속을 이것 저것 관찰하면서, 나는 과연 제주도의 자랑, '삼무 삼다'라는 말이 허명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러나 '삼무 삼다'란 말이 과연 자랑스런 평가에만 해당하는 말일까? 나는 제주도에 있는 대성학원에서 특별 강의를 할 때에 '삼무 삼다'에 관한 내 나름대로의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다. '삼무'란 문, 거지, 도둑이 없다는 말이다. 즉 제주도의 미풍양속을 찬양한 말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말은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온 제주도민의 실상을 보여 주는 말처럼 여겨진다. 화산 지대인 제주도는 원래 척박한 땅이었다. 밭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죄 지은 사람을 내쫓아버리는 귀양자가 아니었던가? 그러한 곳이기에 섬사람들의 생활 또한 어떠했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가난을 멍에처럼 지고 살아야 했던 이 섬의 조상들. 그러니 문인들 무슨 필요 있었으랴? 가진 자는 지키기 위해 담을 높이 쌓고 겹겹이 문을 만든다. 그러나 못 가진 자들은 다리 뻗고 잔다. 빼앗길 것이 없으니 문이 필요 없고, 거지도 있을 수 없고, 도둑도 제 구실을 못 한다. '삼무'란 기실 제주도 조상들의 가난한 삶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삼다'란 어떠한가? 바람, 돌, 여인이 많다는 것은 어떤 관련성을 가지는 것일까? 바람과 돌이 많다는 것은 자연 환경의 어려움을 뜻한다. 화산이 터졌을 당시 용암에 으깨어진 무수한 돌들이 제주도 전체를 뒤덮었으리라. 하여, 이 땅의 조상들은 오랜 세월 동안 피땀을 흘리며 그 용암에 터져 나간 화산석들을 골라 내어 밭을 일구지 않으면 안되었으리라. 화산석으로 담을 쌓고 밭 경계를 삼아 마구 몰아치는 해풍을 이기는 슬기를 익혔으리라. 역경(돌)으로 역경(바람)을 이기는 슬기, 그것이 지금은 제주도 특유의 풍물을 이룬 것 아니었을까? 육지에서 삶을 이어나갈 수 없었던 조상들은 바다에서 생존의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유난히도 험난한 파도와 싸워가며 바람을 구슬러야 했던 그들. 얼마나 많은 목숨이 생존을 위해 해풍의 제물로 사라져 갔을까? 그러기에 아들을 잃고 남편을 잃은 어머니, 아내의 통곡이 육지를 할퀴는 해풍 속에 묻혀졌으리라. 제주도에 '여자'가 많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끈적끈적한 삶의 자취에서 연유된 것이 아닐까? 제주도 남쪽 앞바다에는 신비의 섬 이어도(또는 파랑도라고도 한다)가 존재한다고 한다. 바다에 나가 떼죽음당한 남정네들이 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저 이어도에 살아 있어서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남정네들을 잃고 자맥질로 생을 이어가는 슬픈 아낙네들의 피 맺힌 소망에서 생성된 전설이리라. 삼다의 섬, 그것은 자연이 몰아다 준 역경 속에, 슬픔과 그 슬픔을 이겨내려는 눈물 어린 제주도민의 슬기가 만들어낸 한 맺힌 언어인 것이다. '삼무 삼다' 얼핏 듣기엔 마치 제주도의 평화경을 일컫는 말같이 들리는 그 언어가 실은 이렇게도 서글픈 사연 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제는 풍요를 누리는 제주도의 저 아름다운 삶이 사실은 조상의 한과 피눈물의 결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거리에 우뚝 세워진 선전탑에 "^5 46 5 3456^상 정신 이어받자"('^5 46 5 3456^냥'이란 '조냥' 식으로 발음하는 제주도 특유의 말로 '근면, 검소함'을 뜻하는 말이라 한다.)라고 쓰여진 문구가 조상의 얼을 잊지 말자"라는 뜻과 상통한다는 것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비판의 터널을 거쳐야 진실한 깨달음을 얻는다 창조적 사고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이나 사물에 대한 재래적 관념에 대한 회의로부터 시작된다. 왜 그렇게 규정짓는가? 다른 측면은 없는가? 그렇게 규정지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항상 사물의 표면과 속을 아울러 이해하려는 폭 넓은 관찰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 네 앞에 존재하는 것, 이미 정의되어진 것, 그것들을 비판해 보라. '왜?'라는 언어를 앞세워 접근해 보라. 그리고 그 비판을 통해 새롭게 나타나는 것을 날카롭게 끄집어내라. 그러할 때, 그것은 완전한 내 체험의 세계를 거쳐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의 터널을 거쳐 나온 것만이 내 애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를 사는 젊은이는 현명해야 한다. 나의 의식이 성큼 성큼 자라나도록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어른스러움을 체득하여야 하리라. 한글 티셔츠로 내것 사랑을 추한 영자 단어로 상처받는 젊은 영혼들 요 몇 년 전 보낸 여름들은 뜻있는 한때였다. '뜻 있다'는 것은 가슴에 뿌듯이 와 닿는 보람을 의미하리라. 푸르른 녹음이 그렇고, 찌는 무더위도 그렇다. 여름은 젊음처럼 건강하고, 젊음처럼 맹렬하다. 그 여름에 우리 젊은이의 복장은 발랄함 그대로 티셔츠가 주종을 이룬다. 울긋불긋 거리에 물결치며 흐르는 티셔츠의 행렬은 싱싱한 젊음의 표상처럼 멋지다. 그런데 그 티셔츠에 도안된 무늬며 글자가 문제다. 분명 종로 거리인데, 분명 인사동 골목인데, 현란하게 다가오는 티셔츠의 문안은 마치 라스베거스나 맨해튼 거리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가슴에 자랑스럽게 새긴 글씨. 'I you.' 'Follow me.' 'Touch me.' 끔찍하다. 수줍음 많은 소녀들이여, 출렁이는 너의 검은 머리가 그늘진 그 가슴에 적힌 영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는 아느냐? '나 너 사랑해.' '나를 따라 오세요.' '나를 만져 주세요.' 오, 하느님. 나를 따라오라니, 어디로 따라오라는 것이냐? 따라와서 어떻게 하라는 거냐. 나를 만져 달라니... 차라리 나는 그 영어 단어의 뜻을 모르는 것으로 하겠다. 웃기조차 부끄러워 입을 가리는 너의 예쁜 모습에 너무도 걸맞지 않은 그 영자의 추한 단어들. 그것은 미국하고도 뒷골목, 습기 많은 어두운 곳에서 마약에 취한 자들이나 입는 부도덕한 걸레옷이 아니겠느냐? 어찌 친, 의, 별, 서, 신을 존중하는 이 삼천리 강산에 용납이나 할 수 있겠느냐? 'Beer makes me crazy.' 'Oh, no, I wish a joy life.' 이런 문구를 대했을 땐, 열심히 영어를 배운 내 지난 날이 역겹기까지 했다. 그런 글귀가 적힌 티셔츠는 미국에서도 입기를 꺼릴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낯 뜨거운 옷들이 내 나라에서 휭행한단 말인가? 필시 이 땅에 근무하는 G.I.들에 의해 퍼졌을 것이다. 그런 옷을 입으면 요사이 유행하는 AIDS에 거릴까 무섭다. 아하, 내 탓이로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랴 왜 입는가? 답변은 한결같다. 있으니까 입는단다. 그건 마치 '산이 거기에 있으므로 오른다'와 비슷하다. 무슨 내용의 글인지 알고 있는가?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떤가? 멋있어 보이니 입을 뿐이다. 그러면 예쁜 한글 티셔츠를 입으면 어떠냐? 아저씨, 웃긴다. 그런 티셔츠 아무 데도 없더라. 아하, 내가 잘못했다. 쌀이 없어 굶는 가정에 쌀보다 고기를 먹으라고 하는 격이니 그저 내가 잘못했다. 86년 여름, 나는 한샘 가족 모임을 긴급 개최했다. 한민족의 샘임을 자부하는 '한샘'인 우리가 할 일이 생겼다. 우리 청소년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고운 한글 티셔츠를 만들자고 역설했다. 만장일치. 책을 만드는 우리는 때 아닌 의류 전문가가 되어야 했다. 공장을 선정하고, 예쁜 도안을 그려내고, 취지문을 만들고, 휘장도 만들고...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한글 티셔츠 입기 운동'을 전국에 펼쳤다. 흰색, 빨간색, 청생의 티셔츠에 백제 시대의 미소 짓는 와당 무늬, 김홍도의 서당도 등을 새겼다. 그리고 맵시 있는 글씨로 문구를 살렸다. '^5 3 5 3456 1235^미 기픈 므른 ^5 4 5 3456^^5 15 5 3456^래 아니 그츨 ^5 6 6 5 3456 1235^ 내히 이러 바^5 5 5 3456^래 가^5 14 5 3456^니' '멀위랑 ^5 24 5 3456^래랑 먹고 쳥산에 살어리랏다' '네 꿈을 펼쳐라' 근사했다. 이제는 외래어 (특히 그 추잡한 영어의)티셔츠 몰아내기 운동을 펼칠 차례다. 우리는 용감하게 거리에 나섰다. 명동에서 관철동에서, 한샘인은 용감했다. 거리를 지나는 시민에게 전단지를 돌리고, 거금 2,000원짜리 한글 티셔츠를 무료로 배부했다. 순식간에 티셔츠는 동이 났고, 우리는 몰려드는 인파에 싸여 구슬땀을 흘렸다. 방송에서도, 신문에서도, 잡지에서도, 적극적으로 한글 티셔츠 운동에 호응해 주었다. 전국에서 몰려 오는 주문과 격려 편지. 해외 교포까지도 큰 관심을 가져 주었다. 이리하여 한샘이 만든 한글 티셔츠는 첫 해에 3만 장이나 무료로, 전국으로 해외로 배포되었다. 이제 그 때 받은 수많은 편지 중에서 두 편만 소개해 보자. 저는 미국에 살고 있는 국민 학생입니다. 방학 중에 외갓집에 왔다가 어제 TV를 보고 저도 입고 싶어서 편지를 보냅니다. 미국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요. 10벌만 보내 주세요. 저는 시카고에 살고 있는 데 친구들인 참 많아요. 꼭 보내 주세요. 문주라 올림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국어 교육에 힘쓰고 있는 한샘이 요즘 유행하는 외래어 티셔츠 몰아내기 운동에 앞장 선 행동에 아낌없이 찬사를 보냅니다. 부끄러운 얘기입니다만, 며칠 전 국민 학교 다니는 조카 녀석이 입은 옷에 영어로 '위생처리자'라고 새겨진 문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문제는 형수님이 중학교 선생이신데도 그런 옷을 골랐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러한 풍조는 우리 생활에 깊숙이 배어 있는 듯합니다. 또한 우리 글의 예술적 도안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막상 선생님께서 방송국에 가지고 나오신 티셔츠의 문구와 우리 고유의 무늬 바탕에 예술적인 글씨 도안은 일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금방 입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아쉬움은 젊은이들이 입는 옷인 만큼 상품 제작자들이 자각하고 더욱 연구하여 상품으로 개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물론 우리 소비자의 의식 구조에도 문제가 있지만요. 선생님처럼 힘쓰시는 분이 계시는 한 조속한 시일 내에 그러한 경박한 풍조는 없어지리라고 확신합니다. 삼복에 건강하시기를 빌며, 저도 그 옷 입고 한글 티셔츠 운동에 같이 호흡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구에서 박창오 올림 늦지 않았다 이 땅에 우리의 문화를 뿌리내려야 한다 언어는 우리의 혼을 지배한다. 내가 사용하는 말이 나의 사람됨을 드러낸다면, 그 사회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 시대의 민족의식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 습득은 우리의 전통적 문화 의식 속에서 터잡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갑오경장 이후 근대 사회로의 전환점에서 우리말은 나락에 떨어지는 비극적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이 땅이 강점되자 생소한 일본어가 우리집 대들보 속에까지 스미게 되었고, 더우기 저들의 최후 발악기인 1940년대 전반에는 우리의 글과 말은 암흑 속에 완전히 갇혀 벙어리 귀머거리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었다. 광복의 기쁨은 나랏말의 소생으로부터 확인되었다. 목청껏 불렀던 "만세! 만세!" 소리. 그리고 정겨운 '아리랑' 가락.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랏말의 부활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 땅을 덮은 영어와 러시아 어. 그리고 이어진 민족 상잔의 비극 6^3456 12 15^ 사변. 잿더미로 화한 생활의 터전에서 울부짖던 우리의 부모.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일어서야 했다. 미군이 버린 깡통을 펴서 판자집 지붕을 덮고, 미군 담요로 몸빼를 만들어 입고, 꿀꿀이 죽으로 하루 두 끼를 연명하며 살아야 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내 글과 말을 온전히 되살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한 채, 일본어의 잔재와 영어가 뒤섞여 난무하는 속에서 근대화, 근대화만을 부르짖으며 우리는 전진해야 했다. 근대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서구화를 뜻했다. 삶의 터전을 잡기 위해 마구 살아 온 우리. 이제 국민 소득 5,000달러가 훨씬 넘는 8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겨우 정신 차려 살펴보니, 우리는 조선 땅에 서양식 삶을 이식해 온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라디오, 텔레비전, 비디오, 수세식 화장실, 푹신한 베드. 그 어디에도 한국적 멋이, 한국적 품위가 깃들여 있는 곳이 없다. 우리말은 찌그러들고 오염되어 이제 우리의 영혼 또한 병들려 한다. 나는 우리의 삶을 전통적 삶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주장은 이미 시대착오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한국적 뿌리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전통은 항상 새롭게 탄생한다. 살려야 되는 우리의 옛것이, 흡수되어야 하는 새것과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민족 문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것, 우리 문화는 발전적으로 지켜져야 한다. 양악이 판을 치는 속에서도 판소리의 멋은 인정되어야 하고, 차차차의 가락 속에서도 한국의 춤사위는 더더욱 돋보여야 한다. 양옥집에 살면서도 따뜻한 온돌은 예찬되어야 하며, 서구식 교육을 받으면서도 한국식 예절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세계 속의 한국' '한국 속의 세계'를 확인하는 떳떳한 우리의 주체성이다. 자! 멋진 한글 티셔츠를 입고 이 여름을 달리자 생활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언어가 우리의 혼을 이룩한다는 명제 아래 우리의 생활상, 우리의 언어상을 깊숙이 성찰하라. 그리고 혼탁해진 우리 의식과 우리 혼을 되찾기 위해 젊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깨달으라. 그렇다. 먼저 내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 생활, 우리 노래, 우리 춤, 우리 의상, 우리 민족, 우리말. 다음으로 내것에 대한 발견의 기쁨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한복이라도 한 번 맵시있게 입어 보아야 한다. 색상 고운 부채로 선풍기 바람을 대신해 보아야 한다.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옥중 상봉'한 대목이라도 들어보아야 한다. 탈춤의 흥겨움에 어깨라도 들썩거려 보아야 한다. 창공을 훨훨 나는 태극연이라도 띄워 보아야 한다. 그리고 아름답고 고운 우리말 모음집이라도 한 권 꾸며 보아야 한다. 실천은 이해를 낳는다. 내것에 대한 눈을 띄운다. 그리하여 이해가 바탕을 이루었을 때, 그 때에야 사랑을 느낀다. 사랑을 온몸으로 느낄 때, 촌스러움은 멋으로 변하여 나에게 뜨거운 자긍심으로 다가온다. 그럴 때 나의 입은 열리고 우리는 감격의 가슴으로 노래 부를 수 있다. 아아, 대한민국. 아아, 우리 조국. 아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한샘은 86년 이후 몇 년 간 한글 티셔츠 입기 운동을 열심히 펼쳤다. '한글 티셔츠 디자인 공모전'도 해마다 펼쳤고, '한글 티셔츠 패션쇼'도 개최한 바 있다. 해마다 품질도 고급화시켰고, 색상과 글귀도 다양하게 만들었다. 김홍도의 서당도 그림에 곁들여 '조국의 앞날을 보려거든 젊은이의 모습을 보라'라는 글귀를 넣었더니 더욱 멋져 보인다. 방패연의 무늬 속에 알파벳 대신 한글 자모 24자를 디자인한 것도 역시 멋지다. 도깨비 기와, 에밀레종에 부조된 천녀비상의 모습, 대문의 문고리 문양, 떡살무늬판 등의 다양한 그림을 인쇄한 티셔츠가 올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젊음을 돋보이게 할 것이다. 어느 분은 말한다. '티셔츠'란 말은 또 무엇이냐? 그것도 순수 한글로 고쳐서 사용해라. 고마운 말씀이다. 그러나 서양에서 유래된 티셔츠란 옷에 걸맞은 우리말이 없다. 글쎄, 비슷한 우리말로는 '적삼'이라는 말이 있으니, '겉적삼'이라고 할까? 언어는 사회상의 반영이니, 학자들의 도움을 기다려 보기로 한다. 자, 우리 시대를 싱그럽게 우리 것으로 채워가는 젊은이여, 이 여름에는 유치한 영자 티셔츠 벗어 버리고, 우리 얼을 살찌우는 한글 티셔츠를 입고 한국의 강과 들을 찾아 한국의 멋에 흠씬 취해 보자. 삶의 전진을 생각하며 역사적 전환기로 기록될 갑술년 벌써 한 해가 간다. 세월 속에 의미를 담아 보기도 전에 벌써 달력의 마지막 장이 우리를 맞이한다. 누구나 살아온 일 년이라는 세월. 그 삶 속에 각자는 얼마나 진정한 뜻을 나날의 갈피 속에 새겨 넣었을까? 돌아보는 지난 세월은 험난했었다. 역사의 흐름이란 한 순간도 필연적이 아닌 것이 없다한다면, 근대를 형극 속에 살아 온 한민족의 삶 또한 민족의 가슴에 내재했던 응어리를 풀어가는 역사의 필연적 흐름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36년 간의 일제 식민지 삶의 치욕. 그러나 그 치욕 속에서도 민족의 정기를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간직하고 죽어가던 수많은 우리의 선열. 그리하여 맞이한 광복. 그러나 강대국의 개입으로 국토는 분단되었고, 정치적 혼란 속에 끔찍한 민족 상잔의 6^3456 12 15^를 당했다. 3백만 사상자, 일천만 이산가족, 폐허화된 삶의 터전, 끼니를 이어갈 수 없었던 그 처절한 상황 속에서 민주주의는 한갓 쓰레기통에 던져진 장미꽃 같은 것이었다.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욕. '못 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생존적 절규 속에 피의 4^3456 1 24^는 터졌고, 모처럼 들어선 정부는 4^3456 1 24^에 뿌려진 선혈도 헛되이 5^3456 1 124^ 군사 구테타로 목이 비틀렸다. 어쩌면 그것은 역사의 필연성이었을까? 차라리 민주를 저당 잡힌 채 생존권 보장이 더 시급했던 것일까? '잘 살아보자'는 민족의 소박한 소망이, 정치적 민주화는 유보된 채 오히려 불타올랐던 60년대. 그리고 한국인의 진정한 잠재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어 드디어 우리는 1990년대에 와서 7,000불 소득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그 동안 얼마나 허리가 휘었었던가? '사람다운 삶'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야 하지만, 40여 년이란 짧은 세월 속에 우리의 선배들이 이룩해 낸 일들은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의 또렷한 의식 속에 뻥 뚫린 동공처럼 남아있는 '정신적 민주화의 시체'를. 산 넘어 산의 형상으로 우리는 조금씩 민주화에 접근해 갔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일을 이루어냈다. 문민 정부의 출범과 그에 따른 혼란의 체험.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문민 정부의 통치이기에 우리에겐 새로운 희망이 샘솟는다. 이데올로기 대립의 붕괴에 따른 새로운 세계의 개편. 독일 통일을 보며 우리의 통일도 멀지 않았다고 다짐도 해 보았고, 소련의 갑작스런 해체를 보며 연민의 정을 느끼기까지 하는 급격한 시대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그 급격한 역사의 흐름 속에 갑술년은 흘러가고 있다. 1994년 갑술년. 금년은 이 민족에게 역사적 전환기를 선사한 한 해였다. 북한 핵 해결을 위한 남북 정상 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김일성이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그와 더불어 시작되었던 민족의 분단과 6^3456 12 15^의 상혼과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이 이제 마감된다는 상징적 의미를 띠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정일 체제가 어떠한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회의와 의구심이 가중되는 한 해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문민 정부의 항해가 방향타를 제대로 잡지 못한 듯 불안하게 느껴지는 한 해이기도 했다. 사건도 많았다. 어느날 아침, 한강다리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칭찬했던 성수대교의 한가운데가 칼로 벤듯 덩그라니 떨어져 나갔고, 그에 따른 사상자도 많았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였다. 그뿐인가? 마치 그 동안 앞만 보고 숨차게 달려온 죄과라도 받는 것처럼, 유람선이 불타 수많은 사람이 죽는가 하면, 사격 연습하던 사병이 갑자기 총구를 돌려 장교 둘을 사살하는 기막힌 사건도 터졌다. 그런가 하면, 돈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해서 부부를 납치하여 살해하고 태우고 심지어 그 살까지 먹는 인간 이하의 범죄가 자행된 한 해이기도 했다. 내것에 대한 자부심 속에서 남의 것의 장점을 살려야 현대화를 추진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 버렸다. 정치적 측면은 그만두고라도 현대화 추진에 의한 '우리것'에 대한 철저한 외면은 이제 우리를 완전히 공허하게 만들어 버렸다. '현대화=서구화'라는 등식의 착각으로 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리것'을 잃어버렸나? 숨차게 달려 온 경제 개발의 자취. 그리고 돌아보니 아뿔사, '우리것'은 모두 부수어 버린 뒤였다. 초가집이 양철 지붕으로, 기와집이 시멘트블록 집으로 바뀐 것이 현대화인가? 서정적 정취가 흠씬 어린 깊은 산골, 산사로 향하는 황토길마저 시멘트로 포장해 버린 것이 현대화인가? 남자들의 맵시 어린 한복은 정월 초하루에만 입는 예복인가? 와이셔츠가 아니면 입을 옷이 없게 된 우리의 의생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마저도 한국식 인형은 외면 당해 버렸다. 양식 뷔페를 먹어야 중산층인 듯한 착각에 빠져 버린 우리들. 거리를 뒤덮은 간판, 그 간판은 모두 외래어 투성이다. 도심에 꽉 들어찬 빌딩 숲은 우리를 자랑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우리는 한국인이 아니다. 일상 대화에서조차 서양말을 섞어 써야만 현대인이라고 하고, 커피를 마시고 양과자를 먹어야만 체면이 서는 양한다. 어찌할꺼나? 현대화란 미명 아래 완전히 탈바꿈된 우리의 모든 것을. 그러나 최근에 불붙고 있는 '우리것'에 대한 자각은 신선한 충격이 되어 우리의 몸을 떨게 한다. 한국의 고대사에 대한 재조명의 노력은 우리 조상의 기개에 자부심을 갖게 했고, 민중의 숨결을 되살리는 탈춤, 사물놀이 등의 민속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한민족임을 새삼 깨닫게 했다. '우리것'은 별 볼일 없다는 열등 의식의 시대는 지났다. 내것을 바르게 평가하고, 바르게 수용하는 자세가 바로 이 시점의 과제다. 서양 음식과 함께 우리의 국악도 존중되어져야 하며, 양장과 함께 한복도 자연스럽게 입혀져야 한다. 양식의 별스러움만을 찬탄할 것이 아니라 내 음식의 깊은 맛도 칭찬받아야 하며, 양옥의 편안함 속에 한옥의 운치있는 특징이 흡수 조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독선적이거나 배타적이어선 안 된다. 그렇다고 무조건 '서양식이면 다 좋다'는 치졸한 생각도 버려야 한다. 내것의 멋에 대한 자부심 속에서 남의 것의 장점을 따려고 하는 자세,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다. 교과서 지식의 주입 정도에 따라 우등생, 열등생을 구별해서야 어김없이 입시철이 온다. 스산한 겨울 바람만큼 스산한 대학 입시가 우리의 가슴을 옥조인다. '공부'라고 하는 것이 학생의 본분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공부'는 다만 교과서 속에만 있는 것일까? 교과서의 내용을 누가 더 달달 외었는가 하는 것이 입시의 척도가 될 수 있는 것일까? '공부'라는 명목 때문에 교양 서적 한 권 마음대로 읽을 수 없는 우리 학생들을 보면 가슴이 섬뜩해진다. '인간 교육'이란 말을 잊은 지 오랜 우리의 학교 교육. 교육이 전인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도 우리의 학생들이 '전인'으로 자라나고 있는 가를 눈여겨 보지 않는다. 공부를 위해서는 친구도 필요없고, 사회에 대한 관심은 금기이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여행은 오히려 죄악이다. 오직 공부, 공부. 그러나 한 학급 60명이 모두 대학에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못남을 뼈저리게 느끼는 좌절감 속에 허덕이게 된다. 그렇다면 학교 교육은 결국 낙오자를 길러내기 위한 장소란 말인가? 물론 사회의 전반적 여건이 대학 지향적 현실임을 안다. 그러나 적어도 고등 학교에 다니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교과서 내용의 주입 정도에 따라 우등생과 열등생의 구별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학업 성적의 열등생이 특별 활동의 우등생이 될 수도 있고, 그러한 학생이 더욱 값진 덕성을 지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다양한 특성을 찾아내고 북돋워 주기엔 우리의 교육 현장이 너무나도 앙상하다. 골수에 박힌 이 교육의 고질병이 이제 고쳐지려 한다.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이 자리잡아 가고 각 대학의 입학 전형 방법도 무엇인가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다. 그와 함께 우리의 아이들이 공부를 못 한다고 해서 주눅들 필요가 없는 세상이 곧 올 것 같다. 공부란 단순히 교과서에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양 도서에서, 소설책에서, 자연 관찰 속에서, 예술 속에서, 길거리에서, 인간 관계 속에서 폭 넓게 이루어진다고 하는 상식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이 와야만 하리라. 그리하여 독서 노트가 더 귀중하게 취급되고, 친구와의 교우 관계가 더 귀중하게 관찰되고, 토론에의 활발한 참여가 더 귀중하게 평가되는 교육의 터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의 아이들을 열등생 취급하는 계급적 교육 현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자각을 교육자 전체가 느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금년은 우리의 삶 속에 어떤 좌표로 남겨질 것인가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 그것은 삶의 참맛을 느끼게 한다. 소년 소녀 가장의 처절한 삶의 현실을 읽으면서 나는 오열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그 쓰라린 삶을 용케 헤쳐나가는 그들에게 뜨거운 눈물의 박수를 보낸다. 그들의 삶은 애처러움이며, 나의 부끄러움이며 우리의 감동이다. 척추 장애로 한때 삶을 포기하기까지 했던 한 젊은이가 휠체어를 타고 장애자 농구팀을 지도한다는 이야기는 감동을 지나 생의 외경심마저 느끼게 한다. 소아마비의 몸으로, 두 손으로 바위를 끌어 안고 뒹굴면서 한라산 정산에 기어이 오른 아이들, 누가 너희들을 장애자라 하랴? 육체를 뛰어 넘는 정신의 향기에 생을 예찬하고 싶다. 스스로 장애자이면서 수십 명의 오갈 데 없는 장애자의 재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오늘도 남가좌동 시장에서 좌판을 벌여 놓고 열심히 물건을 파는 어떤 분의 이야기는 슬픔을 지나 성스러움이다. 음지에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는 분들. 그분의 나머지 삶은 누가 위로해 드릴 수 있을까? 불우한 청소년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그들이 꿋꿋하게 살아가도록 '사랑의 모임'을 주기적으로 열어 사랑을 몸소 실천해 가는 분들, 그분들을 뵐 적마다 생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그 감동을 창출해 낸 모든 분들이 새해엔 더욱 큰 축복 속에 지내시기를 경건히 빌고 싶다. 한 해가 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에 맞춰 이제 한 해가 간다. 우리는 금년 한 해 동안 얼마나 진하게, 얼마나 실하게 개인의 역사를 기록했을까? 그리고 그 기록은 자신의 평생 삶 속에 어떤 좌표로 남겨질 것인가? 갑술년 한 해는 이 민족에게 민족 발전의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역사의 획을 긋고 지나간다. 그리고 각 개인에게는 개인마다 잊을 수 없는 일들을 추억으로 만들어 주고 흘러 간다. 이제 며칠 후면 단기 4328년 을해년, 돼지의 해. 재수 좋은 돼지꿈 속에 이 민족에게 축복 있으라. 인류에게 축복 있으라.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새해에는 새 소망 이루는 넘치는 축복 있으라. 그 이름 백두산 백두산 참배의 감격 1988년 여름, 나는 공산 국가 중국을 통해 백두산 천지를 순례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가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여행으로 시작된 일이지만, 백두산 천지를 대하는 순간 나는 강렬한 충격과 감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백두산 천지 그 민족의 성지를 내게 순례하도록 만든 어떤 힘이 있는 듯 느껴졌다. 그 해에 나는 현지 교포로부터 백두산의 사계를 3년간 촬영한 귀한 필름을 입수하여 한국에서 출판했고, 연변의 생활용품을 들여와 "연변 풍물전"도 개최했다. 연변 조선족을 도와야 한다고 함께 방문했던 분들과 상의하여 한, 중한민족친선협회를 결성하기도 했고, 연변의 조선족 지도자들에게 한국의 실상을 알려야 한다고 여러 분을 초청하여 열심히 안내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마다 백두산 천지를 참배해야만 생활의 활력을 얻는 것 같아 몇 년간은 계속해서 백두산을 찾았었다. 1989년에는 연변 텔레비전 방송국과 교섭하여 나의 사회로 본격적인 미용쇼도 벌였었고(지금 연변에서는 미용업이 매우 유망한 직종으로 여겨지니, 거기에서 나의 공로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1990년에는 EBS 교육방송팀을 이끌고 만주에 산재해 있는 독립 운동과 광복군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도 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우리 동포들. 중국 국적을 가지고도 우리의 습속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사는 분들. 한반도에서 살 수 없어 쫓겨난 자의 노래를 부르며 만주에 정착한 분들의 후예. 혹은 독립 운동을 하시다가 산화한 선열의 후예. 북한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으나, 남한에 대한 선망이 강렬한 그분들은 한국에 오기를 열망한다. 이제는 수많은 분들이 다녀갔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많지만, 그래도 그분들의 아픔의 세월을 감안한다면, 따뜻하게 그분들을 감싸 안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계기도 될 것이다. 다음 글은 1988년 여름에 백두산 천지를 참배하고나서 기록했던 기행문이다. 그 당시를 되새기고자 수록해 놓는다. 홍콩을 거쳐 북경으로 백두산 천지를 순례한다는 행운이 나에게 올 줄은 정말 몰랐다. 7,000만 한민족(한국 4,000, 북한 2,000, 해외 동포 약 1,000만)이면 누구나 한 번쯤 가 보고 싶은 백두산. 민족의 발상지이며 성지인 그곳을 찾아 본다는 일념은 마치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드디어 8월 18일, 우리 일행은 중국 과학원의 초청을 받아 중국행 여정에 올랐다. 낯선 곳으로 향한다는, 더욱이 공산 국가로 향한다는 일말의 불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백두산의 성스러운 모습 때문에 발길은 급하기만 했다. 새롭게 국제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는 북경. 공항의 규모도 작고 시내까지의 도로도 시골길 같았지만, 북경은 새로운 경제 발전의 의지 속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거리에 우뚝우뚝 속아 있는 빌딩의 건설 현장이 더욱 그런 느낌을 주었다. 중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을 그들은 "문화 대혁명"이라고 했다. 모택동을 업고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 전역을 휩쓸며, 지식인을 축출하고 혼돈의 시기를 연출했던 "문화 대혁명". 그들은 "문화 대혁명"을 "10년 동란"이라고도 불렀다. 임 표를 위시하여 소위 4인방으로 불려지는 강 청, 장춘교, 요문원 등의 집권욕으로 인해, 중국이란 거대한 국가는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1978년 모택동 사후, 등소평이 등장한 중국 공산당 11기 대회 3차 전원회의에서 실사구시를 부르짖으면서 중국의 현대적 경제 개발 계획이 실천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0년, 아직도 요원한 경제 개발이지만 그들의 의지와 열성은 곳곳에서 열매를 맺는 듯이 보였다. 그들은 일본에 대해 의구심과 노여움을 가지고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에게 침략을 당했다는 아픔으로서도 그렇지만, 경제 개발 과정에서 일본에게 당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중국의 초기 경제 개발 계획에 가장 신속하고 민첩하게 참여한 나라는 일본인 듯하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을 다만 소비재 판매 시장으로만 여겼을 뿐, 중국에의 기술 전수 등 진정한 이웃 나라로서의 따뜻한 우호 관계를 맺지는 못했다. 거리에는 도요다, 닛산 등의 일본 자동차가 거의 대부분이다. 일본 전자 제품도 흔하게 눈에 띈다. 그러나 선진국 일본이 다만 그 물건들을 파는 데에만 재빠른 상혼을 발휘했을 뿐, 본질적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을 중국은 매우 섭섭해 한다. 그 역장용으로 이제는 외국에서의 투자를 갈망하되 70%를 해외로 수출해야 하고, 반드시 자국인에게 기술 전수를 해야 하는 등의 제한을 많이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북경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 오르는 듯했다. 북경에서 받은 인상 북경의 대표적인 거리는 천안문 광장을 끼고 있는 천안대가이다. 일직선으로 뚫린 시원한 대로가 50리에 이어진다니 중국적 기질을 여기서도 느낄 만하다. 천안문 광장은 사람들로 붐빈다. 지방에서 관광온 사람, 산책 나온 아베크족, 소풍 나온 가족들. 천안문 중앙에 모택동의 거대한 천연색 초상화가 붙어 있고, 양 옆에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등의 표어가 적혀 있다. 모택동의 시신이 유리관 속에 안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를 참배하려는 인파가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거리의 인파는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들의 옷맵시도 각양각색이었다. 양장의 모습뿐 아니라, 몸에 꼭 끼는 반바지를 입은 젊은 여인도 있었고, 검은 우산을 양산 삼아 쓰고 다니는 여성도 있었다. 경비하는 경찰들은 함께 사진을 찍자는 우리들의 제의에 어색하게 응해 왔다. 거리의 노점상도 자유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경제 개발과 더불어 자유화 물결이 이렇게 빠르게 북경에 상륙했는가 하는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천안문과 연해진 곳이 고궁. 자금성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명 이후 청나라의 궁성인 이곳의 규모는 거대했다. 황제가 정사를 다루던 누각, 그의 휴식처, 수많은 후궁이 거처하던 곳들. 창경궁, 덕수궁을 떠올리면서 규모면에서는 우리의 궁궐이 물론 작지만, 우리 궁궐이 가지는 정교한 미는 이곳에서 찾기 어렵지 않나 생각되었다. 고궁에 이어진 별궁에는 축출된 4인방이 연금되어 살고 있다고 한다. 비록 정적이라도 목숨만은 끊지 않는 저들의 슬기가 놀라웠다. 북경에는 여러 곳에 공원이 있었고, 그 규모도 역시 컸다. 북해 공원에는 놀러 나온 시민들이 많았다. 연못에는 발로 구르며 운전하는 놀이배들이 유유히 물살을 가르고 있었고, 젊은 남녀의 교제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의복에서 화려함을 찾기는 어려웠다. 쥬스류는 마치 사카린을 탄 듯한 맛이었고, 빙과류도 질이 무척 떨어졌다. 팔달령에 위치한 만리장성. 관광지로 단장된 이 곳은 중국인은 물론 각국인으로 붐볐다. 만리에 이어진 장성. 서울서 부산을 천 리라 한다면, 그의 열 배. 진시황이 북방 민족을 두려워하여 쌓았다는 그 거대한 성벽. 얼마나 많은 백성의 죽음 위에 건설된 것일까? 현재 개방되고 있는 장성은 4Km에 이어진 곳으로 정부에서 보수하여 관광지로 지정한 곳. 입장료를 받고 있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나올 때에 "만리장성 관광 수료증"을 주는 것이 재미있었다. 드디어 연변으로 북경에서 천진까지는 자동차로 세 시간 거리. 가도 가도 산하나 보이지 않는 완전 평야 지대. 모두 옥수수밭 천지다. 농촌 지대의 모습은 빈한하게 보인다. 붉은 흙벽돌로 한결같이 똑같게 지은 집들은 모두 퇴락한 모습, 가끔 거리에 보이는 노점의 모습도 초라하다. 천진에서 연길까지는 급행 열차가 운행되는데, 소요 시간은 28시간이나 된다. 새마을호라면 10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밤낮을 달리고 달려서 열차는 연길로 향한다. 차 안에서 만난 연변 대학교 이 교수에게서 연변의 소식을 미리 듣는다. 열차 식당의 음식은 기름기가 너무 많아 먹기가 힘들었다. 차 안에 서울서 온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연변의 우리 동포들이 찾아온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연변 생활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연변의 중국의 동북부, 북한과 접해 있는 길림성 속의 자치주 이름이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 도문시, 돈화시, 용정현, 혼춘현, 돈화현, 화룡현, 왕청현, 안도현 등 3시 6현의 행정 구역을 가진 이곳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합친 넓이만한 땅으로 인구는 약 200만이다. 중국에 우리 동포가 약 200만 명 살고 있는데, 그 중 이 연변에 80만이 집중 거주하고 있다. 1952년 소수 민족 자치령에 의해 이 곳은 조선인의 삶이 우선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행정부의 장도 조선인이요, 관공서의 문서도, 간판의 글씨도 한글이 먼저요, 한자가 나중이다. 조선족은 예절 바르고, 근면하고 용감한 민족으로 중국 내에 널리 알려져 있다. 능가선무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민족. 북한땅이 손에 잡히는 두만강에 이르렀을 때, 관광 나온 조선족 부인들이 강변에서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한복의 아름다움. 삭막한 북녘 땅이 바로 저긴데,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 이편 중국땅에서 자유롭게 춤추고 노는 조선족 여인들. 그것은 그대로 감격이요, 슬픔이었다. 연변에서 보낸 8일간, 만나는 우리 동포마다 한국을 방문하기를 한결같이 원했다. 한국에 있는 친척들을 만나고 싶다는 그분들의 소망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분들의 생활은 어렵게 보였지만, 그분들이 쏟는 그 환대는 우리를 눈물겹게 했다. 일송장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선구자"의 노래 의미가 다시 새로워지는 땅 용정. 박경리의 "토지"로 우리에게 익숙해졌지만, 그 땅에 남아 있는 우리 민족의 한과 눈물과 역경을 이겨낸 의지가 피부에 와 닿았다. 일송정이 있었다는 비암산 정상에서 용정을 감싸 안고 흐르는 해란강을 바라보는 정희는 남달랐다. 아, 백두산! 드디어 백두산에 오른다. 연길에서 백두산까지 285Km 정도. 그러나 자동차로 거의 8시간이나 걸린다.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길을 마치 말 탄 기분으로 허위허위 달려간다. 백두산 초입에 다다르니 12시. 6시간을 달려왔다. 이젠 원시림으로 꽉 들어찬 양 옆 숲을 바라보며 이제 닦기 시작한 길을 따라 차는 이리 돌고 저리 돌아 백두산을 오른다.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백두산의 기상은 예측하기 어려워 언제 구름이 꽉 들어찰지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천지의 장관을 못 보는 경우가 허다하단다. 마음 속으로 기도를 드린다. "한울님, 저희가 왔습니다. 환웅 천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신시를 이루신 곳. 웅녀를 만나 단군님을 낳으신 곳. 그리하여 한민족의 근원을 이루게 하신 곳. 백두산에 우리가 왔습니다. 분단된 조국 땅이기에 북한을 거쳐 오르지 못하고, 홍콩을 거치고 북경을 거쳐 이렇게 돌고 돌아 이곳에 왔습니다. 구름을 치워 주시고 천지의 성스러움을 우리에게 보여 주소서. 간절이 비옵나니 우리에게 천지의 성스러움을 감추지 마시옵소서." 아득히 펼쳐지는 고원을 한 눈에 바라보며, 저 북간도 그 땅에 찍혔을 옛 조상들의 씩씩함을 느꺼워하면서, 성지 순례하는 마음으로 백두산에 오른다. 원시림의 지대가 지나고 나면 고지대 특유의 초원. 이젠 제대로 자란 풀도 보기 어려워진다. 길은 백두산 턱밑까지 닦여져 드디어 차는 그곳에 당도한다. 급하다. 마음이 급하다. 허둥허둥 발길을 놓아 천지로 향한다. 당도한 정상, 그곳에서 바라본 백두산 천지! 아, 천지! 그곳에 있었다. 저 밑 까마득히 천지의 파아란 물결,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물결까지도 선명하게, 그 신비의 천지는 태고적 모습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천지를 둘러 우뚝우뚝 솟아 있는 봉우리 봉우리들, 저쪽 북한 땅과 이쪽 중국 땅이 그대로 하나의 원이 되어 천지는 편안하게 침묵한 채 그곳에 있었다. 숨이 막혔다. 한 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하고 누가 외마디 소리를 길게 외쳤다. "만세!" 누군가 두 팔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쳤다. 북녘 땅이 고향인, 그 고향에 어머니가 계시다는 동료는 터져 나오는 통곡을 어금니로 깨물고 있었다. 그 때의 감격, 도대체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백두산. 200만 년 전 화산의 분출로 인해 형성된 모습, 멀리 보면 그 정상이 희다고 하여 백두산. '머리 두'자를 쓴 것은 으뜸이라는 뜻. 달리는 태백산, '태'는 으뜸의 뜻이니 '두'와 같은 뜻이다. 그 백두산이 이어이어 산줄기를 이루니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도 부르고 있었다. 백두산 천지는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근원이 되는 곳. 남북으로는 4.86Km, 동서로는 3.35km에 이르고, 호면의 넓이는 10km2, 호면의 해발 2.194m, 최대 깊이 373m. 뭇짐승, 뭇식물의 낙원이라는 원시림을 끝없이 거느리고 전설 어린 16개 봉우리의 시중을 받으며 그윽히 펼쳐져 있는 민족의 깊은 샘. 그 천지를 바라보며 슬픔이 끓어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천지 앞에 무릎 꿇어 기도하고 있었다. 땅의 끝 그곳에 천지는 말없이 있었다. 백운봉 장군봉 읍한 그곳 천지는 오천 년 한결같이 그 모습대로 있었다. 내 어머니 아버지 땅인데 나는 지구를 돌아 남의 땅 모서리에서 민족의 근원지를 본다. 푸르게 이어진 아득한 고원 너머 고구려 조상의 함성 사무쳐 오고 서고성 폐허된 토성에는 아직도 대조영의 자취는 있어 북받치는 설움 어금니로 깨물고 금방이라도 천지에 내 한 몸 묻을까. 까악까악 까마귀만 중국땅 북한땅 넘나들며 우는데. 제4부 생활의 창 회혼레를 경하드리며 1 흘러 세월 60년 두 분 새롭게 결혼하시네. 18세 홍안의 나이에 짝 이루시어 청실 홍실 엮어 오기 60년 이제 미수에 접어드시며 다시 서로를 맞이하네 신랑 신부로. 오곡도 결실 맺어 수확되는 계절 포도주에 남은 짙은 맛이 다시 배는 계절 1932년 11월 1일 그 날은 다시 돌아 오늘이 됐네. 경하로세, 경하로세. 옛날이면 나랏님마저 경하해 주셨다는 회혼날 경하로세, 경하로세. 하늘도 땅도 한데 어우러져 두 분의 회혼날 경하로세. 2 마당에 차일은 펄럭이고 기러기 안은 신랑 대례청에 당도하네. 기러기 치마폭에 싸 가지고 아랫목에 시루로 덮는 뜻은 기러기여, 어여쁜 알 많이 낳아 따뜻하게 키우라는 정성의 뜻. 신랑 신부 재배하고 합환주를 나눌 때 부딪치는 눈길에 미소와 부끄러움 일렁였지. 백년 해로하자고 삶의 끝가지 동반자로 가자고 그렇게 말없이 약속한 그 날. 그 날이여 아, 1932년 11월 1일 그 날이여. 그 날은 60년 한 세월 돌아 1992년 11월 1일 오늘로 이어졌네. 세월도 앗지 못한 두 분의 영원함이여. 3 종로구 경운동 47의 4 결혼하시어 이 날까지 이사 한 번 하지 않고 살아가는 뜻은 애오라지 삶의 뿌리 굳건히 내려 일가를 크게 이루려는 뜻. 60년 세월 모진 풍파 어이 없었으리. 일제의 착취와 감격스런 광복 동족 상잔의 참변과 소용돌이치는 격변 그 속에서도 휘문고보 경기고녀 신학문의 정신 속에 근검 절약 없이는 가정도 민족도 부흥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강직하게 살아오신 한평생. 대나무여라, 그 꼿꼿함으로 선이 아니면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 그 의지로 10남매 키우셨네. 많을 때는 도시락 8개씩이나 싸시면서 너희들이 잘 되는 것이 부모가 잘 되는 것이라 어려움은 전혀 내색도 않으시며 집안의 공력 10남매 키우는 데 쏟으셨네. 부뚜막 정화수에 빌고 또 빌며 발원하던 어머니의 성스런 모습 엄격하고 반듯하게 훈계하시나 재에 덮인 숯불인 양 언제나 은은하게 다가오던 사랑의 훈기. 4 삼대 독자 당신이 하늘도 미안하셨던가 5남 5녀를 짝 맞추어 주셨네. 김해 김씨 조상의 음덕 두 분 지성어린 교육의 결실 자랑스러워라, 다섯 아들 다섯 딸 하나도 상하지 않고 온전히 훌륭하게 장성했네. 이제는 모두 국가에 크게 쓰여 빛과 소금 누리에 번지는 행복이어라. 장남 종성씨 교육계에 투신하고 차남 종열씨 연대 치대 교수이네. 삼남 종철시 대우 그룹 이사이며 사남 종하씨 경제계의 기둥이라. 오남 종엽씨 충남대 교수이니 다섯 아들 한결같이 이 사회의 지도자네. 장녀의 후덕함은 온 가정의 복이요 차녀의 신실함은 온 가정의 믿음이라. 삼녀의 온화함은 한 가정의 평온이요 사녀의 학구열은 미국서도 약사라네. 오녀는 연세대 교수 사위도 박사이니 다섯 딸 모두 모두 온 세상 빛이어라.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듯 열 손가락 한결같이 칭송 받는 가문. 세 박사 탄생시킨 이 드문 가정에 축복은 흘러 넘쳐 손자 손녀 22명 증손자 2명 너희들도 대를 이어 영원히 가문을 빛내거라 오롯한 소망. 5 사랑이란 말 한 마디 건네보지 못했어도 두 분 가슴에 훈훈히 감도는 사랑의 불씨. 금실이 좋다는 말 그 말도 쑥스러워 다만, 생의 마감 그 날까지 항상 곁에 있기를. 주마등처럼 흐르는 지난 세월에 서로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고마웠소" 한 마디. 회혼실은 두 분 기쁨만은 아니네. 부모님 회혼식은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 친척과 일가 아니, 온 누리 넘치는 기쁨이네. 헌수하며 비는 것은 만수무강하오시라. 무병장수하오시라. 해 구름도 축복하고 산 돌 물도 노래하네. 불로초 소나무 그 푸른 기상 속에 거북 사슴 학의 하례를 받으소서. 경하로세 경하로세. 두 분 회혼 경하로세. 빌고 또 비옵는 것 무병장수하오시라. 만수무강하오시라. 1992년 11월 1일 두 분 회혼식을 축하드리며 장남의 친우 서한샘이 올립니다. 신상철(한샘출판주식회사 사장) 아우님의 모친께서 지병 끝에 돌아가시었다. 어머님 세대가 지니신 한이 서러워 그 아들은 폐부를 드러내는 통곡을 했다. 그 심정 헤아릴 수 있겠는가마는,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어머님을 여윈 내 설움도 겹쳐서 추모의 글을 썼다. 어머님, 영면하소서 -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 계실 어머님 영전에 바칩니다. - 어머님, 이제는 그만 지쳐 이승에서 눈을 감으시던 날, 잔뜩 흐렸던 하늘은 기어코 추적추적 겨울비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77세라는 희수의 연세로 보면 "웬만큼 사셨지 ..." 하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나, 그러나 어머님, 하늘 같은 평생의 반려 아버님을 홀로 남겨 두신 것이 못내 안스럽고, 이미 장성해 버린 아들 딸이 아직도 못 미더워서, 어머님, 당신은 쓸쓸한 한 줄기 겨울비라도 뿌려야 저 세상으로 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까? 때로는 시퍼런 강단으로, 그러나 가느다랗게 가느다랗게,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님의 생전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흐릅니다. 어머님의 평생 시린 삶이 눈물겹고, 자식이라고 하지만 노래자처럼 색동옷 입고 부모님께 웃음 드려 봉양하지 못한 회한에 또한 가슴이 저밉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 훌훌 털고 가볍게 가볍게 저 하늘 나라로 가 버리시니, 남아 있는 우리의 한덩어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어머님, 어머님은 가끔 경기도 이천 산골 마을, 아득하나 힘들었던 고향의 추억담을 말씀해 주시곤 했습니다. 그 때는 일제의 착취에 모든 이들이 숨죽여 살던 시국, 1916년 5월 27일, 어머님은 명문의 광산 김씨 집안의 1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나셔서 꿈 많은 시절을 보내셨다 하셨습니다. 16세 되던 해, 어머님은 꽃다운 나이에 충북 음성에 사시는 평산 신씨 집안으로 출가하시어, 60년을 함께 살아 오시는 귀한 분, 아버님을 만나셨습니다. 아버님도 그 때는 세상 물정 잘 모르시는 미소년이셨다고, 그 때를 회상하실 때마다 어머님 볼에 떠오르는 연분홍 홍조를 저희는 잊지 못합니다. 아버님의 직장을 따라 제2의 고향 인천에 정착하시고, 슬하에 3남 3녀를 두시어 억척스럽게 생을 일구셨던 어머님. 그러나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못 하시는 그 고운 심성, 장송의 학처럼 탐욕을 모르시고 살아가시는 그 삶에 어찌 쓰린 고통이 없으셨겠습니까? 아니, 어쩌면 삶의 파편들에 당신의 온 몸을 다치셔서, 외롭게 쓸쓸하게 힘겹게 살아오신 한평생이 아니셨는지요? 어머님, 지금도 기억납니다. 식민지 치하 말기의 그 쓰린 삶 속에서, 6^3456 12 15^의 처절한 비극 속에서, 어둡고 긴 터널처럼 우리 앞에 드리웠던 60, 70년대의 검은 장막 속에서, 그 스산한 세월이 어머님께 드렸던 삶의 아픈 눈물처럼, 저희 남매들이 허기와 갈증 속에 방황했던 그 시절이 꿈결처럼 생각납니다. 구슬프게 울리는 뱃고동 소리에 젖어, 갈매기 울음으로 속앓이하던 그 시절 속에서도, 어머님. 당신은 바다에 떠 흐르는 부등처럼 가난에 마구 떠밀려도 정신만은, 정신만은 시류에 맡겨 휩쓸리게 할 수 없노라고, 그 바둥거림에 어머님, 당신은 또 얼마나 많은 지병으로 고생해야 하셨는지요? 어머님 생애에 가장 기쁘셨던 순간은 아마도 3남인 상철이가 서울 대학교에 당당히 합격했던 그 순간이 아니셨는지요? 학비가 없어 이리저리 부딪치며 멍들어 가는 자식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머리털이라고 잘라 학비에 보태리라고 숱도 별로 많지 않은 긴 머리를 선뜻 자르셨던, 아, 어머니. 둘째 딸을 먼저 잃으시고 내가 먼저 가야 한다고, 내가 가야 했을 것이라고, 넋을 잃고 통곡하시던, 아, 어머님 어머님. 어머님. 이제 3남 2녀, 5남매 어엿이 장성하여, 어머님 꽃다운 나이에 출산하신 장남은 벌써 머리 희끗한 육순의 나이에 접어듭니다. 좋은 배필과 짝지어 모두 다복하게 옛 고생 웃음으로 이야기하며 살아가는 나이들이 되었습니다. 어머님의 무언의 교훈처럼 11명이나 되는 손자 손녀도 자랑스럽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이제는 옛말하며 아들 딸 사위 며느리 못다한 호도 받으시고, 손자 손녀 재롱 받으시며 살아가실 연세에 홀연히 먼저 가버리시니, 저희의 남은 회한은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아들 딸 사위 며느리가 무심코 뱉은 말 한 마디에, 생각지 않은 행동 하나에, 마음 쓰리셨던 그 기억의 흔적을 이제 어떻게 지워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어머님, 당신께서 건강하셨다면 반드시 차려드리려 했던 회혼식, 두 분이 부부되어 60년을 한결같이 사신 그 귀한 인연을 흠뻑 축하해 드리지도 못한 이 불효를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평소에 무뚝뚝하시나 사랑을 깊이 묻으셨던 아버님, 아직은 홀로 된 외로움을 실감하시지 못하시지만, 어머님 안 계신 빈 자리, 뻥하게 뚫릴 그 고독을 누가 위로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머님, 우리는 압니다. 하늘의 부름따라 우리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맞이하기 위해 먼저 가신 어머님처럼 오늘을 선하게, 부끄럼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어머님을 떠나 보내며 우리는 새삼 압니다. 인생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기에 삶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후회할 것 없는 사랑을 서로에게 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믿습니다, 어머님, 당신은 쓰리게, 올곧게, 따뜻하게, 일생을 사셨으므로 왕생 극락하셨다는 것을. 하여, 우리 잠깐 살다 가는 이승에서의 눈물이, 영원한 삶을 획득한 어머님에게 부질없다는 것을. 어머님, 이승에서의 모든 염려의 끈을 놓으십시오. 홀로 남으신 아버님, 이 아들 딸 사위 며느리가 어머님께 못다한 효도까지 합쳐 정성껏 모시오리다. 어머님, 이제는 이승을 돌아보지 마십시오. 남아 있는 저희들 서로 우애를 다하여 사랑하고, 어머님께 부끄럽지 않은 자손이 되오리다. 어머님, 아무리 불러도 다함 없는 어머님, 언제나 우리의 마음 속에 이명처럼 남아 계실 어머님, 하늘 나라에서 어머님을 만나 뵈올 그 날까지 어머님, 편안히 명복을 누리소서. 아, 풀려 해도 풀 길 없는 회한 속에 어머님을 이렇게 떠나 보내야만 합니까? 어머님, 어머님. 왕생극락하옵소서, 극락전에서 명복을 누리소서. 1992년 12월 8일 어머님을 떠나 보내기 서러운 자녀를 대신하여 서한샘이 올립니다. 친우를 떠나 보내며 친구여, 그대는 정녕 갔는가? 사랑하는 부인과 자녀들을 앞에 하고 그대가 정녕 갔단 말인가? 앞으로 이루어야 할 그대의 꿈, 마무리지어야 할 인생의 설계, 그 모든 것을 미완성으로 놓아둔 채 그대는 정녕 다시 오지 못하는 저 세상으로 갔단 말인가? 친구여, 그대 홀연히 떠났다는 말을 전해 들은 우리, 우리 누군들 그 말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단전 호흡의 수련 속에 항상 건강하게 살아왔던 그대. 반듯하게 소명받은 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간 그대. 하여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컸던 자네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러한 병의 예고도 없이 이승을 하직하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는 사실, 누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겠나? 말해 보게나, 친구여! 친구여, 그대는 인생을 마감하는 날, "생명의 실상"이란 책을 읽고 있었네. 하느님께 생명을 부여 받아 생명을 주신 분의 뜻대로, 선 의지 속에 살아가는 우리, 그대가 읽고 있었던 "생명의 실상"이란 책에서 그대는 생명의 무엇을 깨달았던가? 그리고 그 깨달음 속에 친구여, 그대 호흡이 멈춰져 버렸단 말인가? 자네가 살아온 삶, 그것은 동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의 삶속에서도 빛나는 생애였네. 자네는 나와 함께 인천 동명 국민학교를 나왔네. 예절과 바른 삶의 방법을 각별하게 익혔던 국민학교 시절, 자네는 그 때부터 사려 깊은 행동으로 반듯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네. 영재들만이 모인다는 인천 중학교, 제물포 고등 학교를 그 어려운 생활 환경 속에서도 우수한 성적과 덕성으로 졸업하고, 이 나라 경제계에 이바지하기 위해 서울 대학교 상과 대학을 자랑스럽게 다녔던 자네.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전공을 은행에서 꽃피우겠다는 신념 속에 외환은행에 입사하여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오직 한 길, 한국 최고의 은행인이 되기 위해 몰두해 왔던 모범적인 자네의 삶. 미국 LA 지점장으로, 최근에는 스웨덴 스톡홀름 사무소장으로, 해외 수출 업무의 뒷바라지를 하다가, 본점 간부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업무를 익히던 자네. 친구여, 그대를 아는 상사, 선배, 동창, 후배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네. 손명대. 친구에게 손톱만한 의리라도 철저하게 지킨 우애의 인물. 단정한 생활 태도 속에 항상 절도 있는 삶을 살았던 친구, 후배들에게 일처리를 꼼꼼히 가르쳤고, 청렴 결백함 속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티끌 없도록 직장일을 마무리했던 친구. 친구여. 이 혼탁한 시대 자네가 내세웠던 삶의 지표, 자네가 올렸던 깃발, 그것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던가? 이제 인생의 꽃을 마음껏 피울 수 있는 오십을 내다보는 나이, 천명이 무엇인 줄 알아 이 나라 경제계를 위해 그대 지녔던 큰 뜻을 마음껏 펼쳐 볼 수 있는 그 좋은 나이에, 갑자기 이승을 마감한 것은, 어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친구여, 어쩌란 말인가? 그대를 벗삼아 살아온 그대의 아내는 어쩌란 말인가? 친구여. 어쩌란 말인가? 그대의 자랑스런 아들 딸은 어쩌란 말인가? 친구여, 그대와 더불어 소주잔을 나누며 인생과 직장과 민족과 조국을 논하던 후배, 동문, 친우들은 어쩌란 말인가? 어쩌란 말인가? 친구여! 모든 것 다 유보한 채로 그대만 천국에 들면 어쩌란 말인가? 진실, 선, 무리 없는 삶, 건강 그대가 그토록 이야기하던 것들, 이제 누구와 더불어 이야기 할 수 있는가? 하느님이 예비하신 길을 따라 우리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나는 것을, 자네를 떠나 보내며 우리는 생각하네. 인생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항상 눈감음을 예비하여 오늘을 진실되게, 값지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믿네. 요셉 손명대, 그대는 참되게 따뜻하게, 그리고 진실된 믿음 속에서 인생을 살았으므로 하느님께서 하늘 나라에서의 영생을 주셨으리라는 것을. 영생을 획득한 자네에게 이승에서의 눈물이 무슨 의미 있겠는가? 그러한 신앙적 믿음이 외롭게 남은 자네의 부인에게도 굳건히 뿌리내릴 줄 믿네. 친구여, 아무리 불러도 다함이 없는 친구여, 언제나 우리들 마음 속에 또렷한 영상으로 남아 있을 친구여. 생각하고 생각해도, 어찌 그대 눈을 감았는가? 아, 이제 그대를 영원히 떠나 보내야 하는가? 흐느낌 속에 자네를 영원히 떠나 보내야 하는가? 친구여, 하늘 나라에서 명복을 누리시라. 명복을 누리시라. 1991년 5월 3일 그대를 떠나 보내기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친우를 대표하여 서한샘이 읽었습니다. 젊음은 희망이어라 불꽃은 사위어가고 우리의 함성도 밤하늘에 묻힌다. 이제 촛불을 밝혀 내 마음에 담는다. 젊은이여, 아파하지 말라. 재수는 다만 고통일 뿐 부끄러움은 아니다. 합격의 영광을 안은 친구를 축하하고 젖은 눈빛으로 쓸쓸히 돌아 앉은 우리. 그러나 그 시련은 네 진정한 모습을 보여 보라는 하늘의 채찍질이 아니던가? 그렇다. 아픔은 성숙으로 보상된다. 유보된 일 년 속에 네 의지의 불꽃을 태우라. 젊은이여, 미래를 창조해 나갈 젊은이여. 과연 운명은 있는 것인가? 젊은이여, 스스로에게 물어 보라. 과연 운명은 있는 것인가? 추억을 씹으며 사는 사람에게 운명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젊음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운명이란 없다. 젊음의 시간은 오히려 운명을 만들어 가는 시기이다. 그대들은 무엇이 되고 싶은가? 어떠한 꿈을 이루고 싶은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아름다운 꿈을 가슴에 품었다면, 젊은이여, 마음껏 도전하라, 그대 꿈의 완성을 위해.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우리의 젊음을 무너뜨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활이 아무리 슬프다 할지라도, 우리의 미래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젊은이여, 비록 그대의 날갯짓 가녀리다 해도 두려워 말라. 두려움 훨훨 떨쳐 버리고, 네 꿈을 펼치기 위하여 도전하라, 실천하라, 그리고 비약하라. 하여, 아득히 세월 흘러 추억을 말할 나이에 지난 젊은날의 너의 초상을 돌아보며 자신있게 말하라. 내 운명은 내가 만들었다고. 내 인생은 나의 주체적 의지로 일으켜 세웠다고. 젊은이여, 추운 겨울 내내 얼어 붙어 죽은 듯하던 목련나무, 이제 봄이 오면 어김없이 샘물을 빨아 올려 싱싱한 새순이 돋고, 잠시 후엔 순백색 순수처럼 목련꽃은 피어 하늘로 비상한다. 개나리를 보라. 죽은 듯 가녀린 가지에 봄이 오면 샛노란 꽃이 눈부시게 피어나고 그 꽃 사위어질 때쯤 파릇한 잎이 돋는다. 아, 그 순수, 그 의지. 닮지 않으려는가, 그 치열한 삶의 모습을, 하여, 네 생애의 소담스러운 꽃을 피우기 위해 젊은날을 투자하라, 투자하라. 젊은이여, 한민족의 오늘을 가늠하라. 고난의 역사로 점철되어 온 배달 민족. 6,25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남북의 동포는 언제 만날 수 있는가? 이제 낡은 이념도 무너지고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어차피 남북한의 통일, 그것은 금세기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 한라산 백록담에서 백두산 천지에 이어지는 금수강산 한반도에 통일된 칠천만 겨레의 환호의 함성을 상상하라. 가슴 벅찬 그 역사적 순간에 그대들이 자리할 미래의 위치는 어디인가? 젊은이여, 그대들의 순수한 젊음의 피가 용솟음치지 않는가? 그 통일의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 젊은이여, 그대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러리라, 그 날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준비해야 하리라.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의 눈빛을 닦아 우리의 실력을 쌓아야 하리라. 통일의 주역이 될 그대들이기에 피맺히게 준비해야 하리라. 오늘을 쉴 수는 없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는 없다. 사회의 지도자로 성큼 자라 통일의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젊은이여, 기꺼이 오늘을 희생하라, 희생하라. 젊은이여,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다운 사람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사랑이리라. 사랑이리라. 샘물처럼 번져 주변을 따뜻이 녹이는 사랑이리라. 과학 문명이 아무리 발달하고,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는 시대가 온다 할지라도 삶이 사는 사회를 이끌어 갈 마지막 힘은 사랑이리라. 젊은이여, 그대 사랑해 보았는가? 그대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대에게 성장을 주신 아버님, 어머님을 그대 진정으로 사랑해 보았는가? 그대와 피를 나눈 그대의 형제 자매를 진정으로 사랑해 보았는가? 가끔은 그대를 괴롭히는 친구, 그러나 평생을 살아가야 할 친구. 그대 가슴을 열고 그 친구의 약점까지 얼싸안아 뜨겁게 포옹해 보았는가? 스산히 낙엽 뒹굴 때 흘러간 유행가 가락을 처량하게 부르는 거리의 걸인, 그 걸인의 터진 손길과 일그러진 얼굴, 그 모습을 가슴에 묻어 통곡해 보았는가? 사랑할지어다. 사랑할지어다. 가슴을 열고, 너를 감싼 네 주변의 모든 것을 내 뜨거운 순수 속에 용해할지어다. 그리하여 나를 양보하고 나를 숨겨, 더불어 사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촛불이 될지어다. 아, 조국의 미래를 보려거든 그 나라의 젊은이를 보라고 했다. 젊은이여, 세계에 한국의 얼을 심어갈 젊은이여. 배달의 얼 속에 네 주변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생각하라. 그리고 미래를 위해 오늘을 준비하라. 실력을 쌓으라. 의지를 키우라. 뜨거운 가슴으로 현실을 안고 눈빛은 저 푸른 하늘을 보라. 하여, 젊은이여, 네 꿈을 펼쳐라. 시험장으로 향하는 제자들에게 __최선을 다한 저들에게 신이여, 축복하소서__ 결전의 날은 왔다.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이제 시험장으로 향해야 하는 결전의 날은 왔다. 지난 봄날의 다짐, 여름철의 수많은 갈등의 비늘들, 시간에 쫓기는 가을의 깊은 밤, 이제 다 지나고 미완성이나마 출전의 채비를 차릴 때는 왔다. 두려워 말라. 80만의 대행군이라 할지라도 두려워 말라.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시간의 낭비가 어찌 없었을까마는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당당한 발걸음으로 시험에 응하리라. 우리의 눈에는 젊음의 불꽃이 일렁거리고, 우리의 뜨거운 가슴 속에는 지성의 칼날이 운다. 남을 압도할 수 있는 의젓함으로 우리는 시험에 임하리라. 입가엔 미소를 띠고 어금니를 지긋이 깨물리라, 하여, 두려움을 떨쳐내고 지극한 평온함 속에 내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떨치리라. 나는 나를 믿는다. 삶의 신념과 갈등의 응어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한 전망까지 모두 얼싸안고, 나는 나를 믿으려 한다. 공부한 모든 것은 내 체내에 녹아 있다. 국어의 한자, 과학의 공식, 망막을 스친 모든 기본 개념과 문제들이 내 체내에 녹아 있음을 나는 확신하다. 시험장에서 그 모든 것들은 생생히 살아서 무서운 힘을 발휘하리라. 그리하여 나를 믿는 나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나에 대한 믿음__그것만이 성공의 열쇠임을 나는 안다. 나의 왜소한 체구, 조그마한 손, 그러나 그 속에 내 모든 실력이 녹아 있음을 나는 안다. 확인시키리라. 내 가볍게 물러서지 않음을, 나 자신에게 확인시키리라. 눈을 감고 잠시 명상에 젖는 내 뇌리에 스치는 얼굴들. 지난 아름의 세월 동안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삶의 고마움을 느끼게 해 준 사람, 지식과 덕성의 횃불을 밝혀 준 분, 모두가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떠오르는 어머니, 어머니.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나는 물러설 수 없다. 치열한 삶의 의식 속에서 반드시 '나' 자신을 세우리라. 하여 나 여기 있노라고 포효하리라. 주여, 저들이 떠나나이다. 저들의 가녀린 날개에 새 살을 돋게 하시고 자칫 헛딛기 쉬운 저들의 발길에 힘을 주소서. 저들의 눈을 밝게 하시고 저들의 손을 따뜻하게 하시어 두려움을 이기는 평온을 조급함을 이기는 냉정을 슬픔을 이기는 슬기를 저들에게 부어 주소서. 주여, 저들이 최선을 다했사오니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한 해를 마감하며 시험장으로 향하는 제자들을 격려합니다. 한샘학원 교강사 일동 축복 한샘의 의지 한민족의 크고 유일한 샘 한샘은 큰 샘입니다. 한생은 유일한 샘입니다. 한샘은 한민족의 샘입니다. 한샘은 근원이고자 합니다. 물방울 모여 시내가 되고 시내는 모여 강물이 됩니다. 강물은 모여 바다를 이룹니다. 한샘은 바다를 이루는 큰 뜻으로 근원이고자 합니다. 근원은 깊고 깊어서 모든 것을 포용해 줍니다. 어미 품 속에 부리를 비비는 새새끼의 가녀린 날갯짓도, 짓궂게 뿌려대는 빗줄기로 하여 바알갛게 떨어져 나간 꽃잎의 눈물도, 매서운 바람에 찢겨 나간 나무가지의 생채기도, 한샘은 뜨겁게 감싸주고 어루만져 줄 것입니다. 물방울 같이 순수한 정성으로 작은 것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 크게 키워 '우리들'의 소망이 영글도록 한샘은 최선을 다하렵니다. 한샘은 통곡하고 싶도록 이 나라를 사랑합니다. 비판해도 비판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랑이기에 한샘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사랑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샘은 감히 한민족의 샘이 되고자 합니다. '나'를 확인하고 '너'를 찾고, '조상'을 확인하고 '꿈'을 찾고, 한샘은 이 겨레의 실체를 탐구하여 그것을 빛내는 샘이 되려 합니다. 한샘은 겨레의 긍지를 잃지 않으려 합니다. 파란과 곡절 속에서 오히려 겨레의 슬기와 의지를 꽃피워 온 강인한 민족 정기를 한샘은 확인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를 잇는 징검다리가 되어, '겨레의 꿈' 실천에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렵니다. 교육의 샘, 문화의 샘__한샘은 내일을 여는 의지 속에 새로운 문화 창조를 위해 좋은 땀을 흘리렵니다. 인간의 삶을 좀더 건강하게, 좀더 풍요롭게, 좀더 여유 있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메마른 우리 가슴에 정서의 샘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한샘은 뜨거운 사명감으로 우리의 일을 추진해 나가렵니다. 그리하여 한민족을 위한 크고 유일한 샘이 되도록, 한샘은 모든 것 다 바치겠습니다. 위의 글은 "한샘 대입 국어" "한샘 대입 문학"의 머리말에 수록된 글이다. 한샘의 의미, 한샘의 사상, 한샘의 목표를 밝힌 글이다. '불휘 기픈 남^5 4 5 3456 35^ ^5 45 5 3456^^5 5 5 3456^매 아니 뮐^5 6 6 5 3456 1235^ 곶 됴코 여름 하^5 14 5 3456^니. ^5 6 5 3456 1235^미 기픈 므른 ^5 4 5 3456^^5 15 5 3456^래 아니 그츨^5 6 6 5 3456 1235^ 내히 이러 바^5 45 5 3456^래 가^5 14 5 3456^니.' "용비어천가" 2장의 내용이다. 그렇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그 물은 내가 되어 바다로 도도히 흘러가나니, 그 물이 바로 한샘인 것이다. 이제 한샘 설립에 얽힌 이야기를 밝혀, 어제를 돌아보아 반성하고 미래의 우리 할 일을 새삼 다짐해 본다. 도전하라 네 뜻을 펼치기 위해 한 곳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생래의 몸짓 때문이었을까? 나는 고민 끝에 교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선생은 어쩌면 멈춘 세월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밀려 오고 밀려 가지만, 선생은 언제나 제 자리에서 젊은 그들과 생활하고 호흡한다. 그래서 선생은 항상 젊은 기분에 싸이나보다. 그러다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면, 떠나 보낸 아이들은 이미 사회인이 되어 있고, 자신은 멈추어진 시간 속에 어느덧 백발이 성성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깨달음이 오면서 나는 또 한 번 도약을 위한 변신을 꾀하고 싶었다. 나는 60명의 담임으로 끝나고 싶지는 않았다. 2,000여 명의 담임이 되어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교육의 모습을 실천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내가 학교를 설립하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돈키호테와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나는 교직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교직을 떠났다. 내가 학교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내가 전공한 국어로 끝장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참고서를 멋지게 써서 베스트셀러를 만들어야만, 길이 열릴 수 있으리라. 그러려면 입시의 현장인 학원의 실태를 몸소 체득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학원계에 뛰어든 그 첫 해에, 나는 학원이 학교와는 전혀 다른, 학교 선생이 쉽게 동화되기 어려운 구조하는 것을 알고 매우 당황했었다. 그러나 어쩌랴, 아미 결행된 내 결심인 것을, 마음을 독하게 사려 먹고, 나는 내 목표를 향해 매진하기로 했다. 그 다음해 입시가 코 앞에 다가왔을 때,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 평생을 이 외아들을 위해 당신의 삶을 바치셨던 어머니, 이제 손자 손녀를 키우는 즐거움으로 사실 만하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께서 평생 겪으신 고생의 누적 때문이었던가, 암에 걸리셔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더니 종국에는 입원도 거부하신 채 몸져 누우셨었다. 운명하시던 날, 어머님은 당신이 운명하실 것을 미리 아셨던가? 당신 스스로 하이얀 소복을 갈아 입으시고, 금가락지며, 꼬깃꼬깃한 돈을 깊숙이 보관한 쌈지 주머니 등을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아 두시고, 어머님은 이 세상 고통 모두 잊으신 온화한 모습으로 아들의 손을 꼭 잡으신 채 운명하셨다. 내 스스로 어머님의 묘지를 정하여 장례 모시고 삼우제를 지낸 날 밤,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기이한 꿈을 꾸었다. 우리 집을 둘러싸고 뺑 둘러서 큰 도랑이 처져 있었다. 그리고 그 도랑에는 넘실거리는 맑은 물이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부신 도랑은 우리 집을 끼고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 아들에게 남긴 그 꿈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깨달았지만, 아, 그것은 '한샘'이었다. 어머님 돌아가신 그 이듬해에, 나는 드디어 출판사를 차렸다. '한샘출판사'. 그 이름은 의외로 쉽게 지어졌다. 순수 고유어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고, 평소에 생각한 내 삶의 지표와 연결시켜 지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내 이름도 '서한샘'으로 바꾸었다. 남자 제자를 영업부장으로, 여자 제자를 편집 사원으로 해서 나는 드디어 한샘출판사의 첫 작품으로 "한샘 예비 고사 국어"를 발간했다. 첫 책을 냈다는 기쁨 하나만을 가지고 나는 단과반 학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시간표에 예비 고사 국어 강의를 줄줄이 넣었다. 그 당시에는 객관식 예비 고사와 주관식 본고사의 2중 시험 제도였으나, 주관식 본고사 공부가 위주였었다. 따라서 다른 선생들은 모두 본고사 강의를 시간표에 넣고 있었지만, 나만 예비 고사 국어를 강의한다고 설쳤던 것이다. 그러니 다른 선생이 보기에 참 딱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어인 변화인가? 1980년 7월 30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7^3456 14^^3456 245^ 조치를 내렸다. 7^3456 14^^3456 245^ 조치는 교육의 대변혁이었다. '망국병에 이른 고액 과외를 뿌리 뽑는다. 그러기 위해 본고사를 없애고 예비 고사만으로 대학 입시를 치른다. 재학생은 과외 및 학원 출입을 엄금한다. 이 조치는 당장 8월 1일부터 시행한다.' 학원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미 등록을 마친 학생들은 줄줄이 환불해 가는 소동이 벌어졌고, 재학생에게 명성이 높았던 대강사들은 하루 아침에 강의를 놓아야 하는 참담한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수강료 환불로 인하여 파산 지경에 이른 어느 학원 원장은 자살과 같은 교통 사고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별 타격이 없었다. 아니, 대학 입시가 예비 고사만 치르게 되어 있으므로, 오히려 "한샘 예비 고사 국어"는 인기를 끌게 되었고 내 강의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이듬해, 나는 "한샘 현대문" "한샘 고전"을 펴냈다. 나의 야심작이었다. 이 책은 나 나름대로의 창의성을 듬뿍 담았다. 첫째, 판형을 4,6배판으로 키웠다. 그 당시 참고서는 모두 국판(교과서 크기)이었다. 4,6배판(현재 국어 자습서 크기) 크기의 참고서는 내가 처음 시도한 것이다. 국어 참고서는 지문 위주로 공부한다. 그런데 지문이 긴 경우 그 지문이 다음 쪽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앞뒷면을 왔다 갔다 하면서 문제를 푸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이 바로 4,6배판 판형인 것이다. 둘째, 표지도 새롭게 하고 싶었다. 제목이 위에 붙어 있고 밑에는 그림이 있는 천편일률적인 구도. 제목이 표지의 한가운데 있으면 안 되는가? 표지를 넘기면 시 한 편이 나오고, 머리말 또한 한 편의 수필처럼 쓰는 것, 그것이 공부하는 학생들을 잠시라도 위로하는 길이 아닌가? 셋째, 학년별 순서를 무시하고, 영역별로 묶어 재편성했다. 각 장르의 철저한 기본 개념 습득과 전체 작품의 조감 능력을 키우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1, 2, 3학년 교과서에 수록된 시 24편도 교과서 순서대로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 순서 및 시파의 유형별로 재구성하여 작품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배열했던 것이다. 넷째, 나는 문제의 배열 순서에 있어서도 전혀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재래의 참고서는 그 문제의 배열 모두 연역식(?) 배열 순서를 취하고 있었다. 즉, 처음에 주제, 문단 구분, 핵심어 등의 거시적 질문으로 시작하여, "밑줄 친 ㄱ은 __?" "밑줄 친 ㄴ은 __?" 등의 미시적인 질문으로 좁혀 가는 배열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참고서가 왜 필요한가? 그것은 학습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의 배열 순서는 귀납식(?) 배열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작은 질문에서 큰 질문으로 배열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문제의 배열 순서를 과감하게 바꾸어 놓았다. 즉, "밑줄 친 ㄱ은 __?" "밑줄 친 ㄴ은 __?" "A문단의 요지는?" "밑줄 친 ㄷ은 __?" "밑줄 친 ㄹ은 __?" "B문단의 요지는?" 등의 순서로 나가다가, 뒤에 전체를 마무리지어 "A__D 중, 중심 문단은?" "이 글에 알맞은 제목을 붙여라." 이러한 순서로 문제를 짜고 배열하였다. 다시 말하면, 미시적 질문에서 거시적 질문으로 확대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강의하는 순서를 그대로 문제화한 것이니, 학생들이 혼자 공부하는 데도 대단히 효율적인 것이었다. 그 이외에도, 책의 구석구석에 새로운 방법을 심으려고 나는 매우 고심했었다. 최선을 다하면 응답은 있다 나는 하루에 100분씩 5분 타임, 즉 매일 500분 강의를 했지만 힘든 줄을 몰랐다. 항상 의욕에 차서 정성을 다해 강의했다. 그리고 한 달 강의가 끝나면, 나는 학생들에게 호소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여러분에게 강의했다고 생각한다. 왜 그랬는가? 그것은 내가 발간한 "한샘 현대문" "한샘 고전"을 베스트 셀러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래야만 내 꿈을 펼 수 있기 때문이다. 수강생들이여, 내가 최선을 다해 강의했다고 생각한다면, 나를 도와 달라. 여러분의 친척 동생, 주변 친구, 후배들에게 내 책을 권해 다오." 나는 그렇게 학생들에게 강렬하게 호소했다. 나는 단과 학원에 진출한 지 3년만에 한샘학원을 설립했다. 그 때 나를 도와 준 귀한 선생님들을 잊을 수 없다. 한샘학원은 설립되자마자 그 성가를 높였다. 나는 일요일도 없이 전쟁을 치르듯 강의를 했다. 어느 분의 권유를 받아 부산에 한샘학원을 설립하게 되었을 때, 그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산 서면, 아담한 신축 건물에 한샘학원의 간판을 걸었고, 많은 선생님들을 서울에서 모시고 내려갔지만, 전혀 낯선 땅 부산에서 학원의 기틀을 잡아 나가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 스스로를 던져 불사르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는 거의 일 년간을 매일 서울 부산을 왕복했다. 새벽 6시에 시작되는 오전 강의는 11시 40분에 끝났다. 곧장 김포 공항으로 달려가서 부산 한샘학원으로 내달렸다. 오후 3시부터 부산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고 다시 공항으로 내달려 5시 반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는 7시 반부터 밤 10시 반까지 저녁 강의를 강행했다. 그렇게 강의를 거의 일 년을 했다. 가능하지 않은 그런 일을 무슨 오기로 해 냈을까? 그것은 한 번 시작한 일은 물러서지 않는다는 내 의지의 확인이었으리라. 지금 부산 한샘학원은 많은 제자를 배출한 전통 있는 학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 달 강의가 끝나는 날이면 허탈해지곤 했다. 그 밤에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밀려오는 상념에 밤을 하얗게 밝히곤 했다. "저에게 내리시는 축복의 뜻은 무엇입니까? 일개 고등 학교 교사인 저에게 당신은 무슨 일을 시키시려 하시는 것입니까?" 나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그분이 내게 크나큰 축복을 내리시는 것은, 바로 나를 통해서 무엇인가 증거하시고 싶은 일이 있으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샘은 그 동안 고통도 있었고 좌절도 있었지만, 항상 새롭게 전진해 왔다.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것, 사회 봉사의 기쁨을 창출하는 것, 교육적 명분을 앞세우는 것, 그러한 정신 속에 한샘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출판으로, 학원으로, 사업이란 이름의 규모로 확대되어 있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하는 일이 떳떳한 명분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혀 무의미한 일에 불과하리라. 한샘, 한샘은 맑아야 한다. 한샘, 한샘은 주변을 적셔야 한다. 한샘은 한민족 교육의 샘으로서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하여야 한다. 이제 한샘은 케이블 TV 교육 전문 채널인 "다솜방송"에 참여했다. 한샘의 의지와 한샘의 창의력이 새롭게 시험받게 된 셈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성공해 보일 것이다. 한샘을 누가 이루었는가? 그것은, 한샘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한샘을 등에 지고 줄기차게 전진해 온 한샘 가족들이 이룬 것이다. 그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평생을 삶의 보람을 나누고 싶다. 나는 이제야 내 꿈의 시작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꿈을 크게 펼치고 싶다. 그 꿈의 실현이 어디까지 이루어질 것인가 나 자신도 모르지만, 그 꿈이 삶에 의미를 더하고, 보람을 더하기를 나는 소망한다. 내 주변의 고마운 분들께 항상 감사드린다. 제5부 아빠가 쓴 육아 일기 아버지의 기도 맥아더 주여, 내 아이를, 약해질 때 자신을 아는 강한 힘을 두려움 앞에서는 용기를 올곧음으로 인한 패배에는 긍지를 가지며 승리하였을 때 겸허하고 온유한 자로 키우게 하소서. 비오니 내 아이를 평탄한 길로만 이끌지 마시고 고난과 역경의 삶으로도 인도하소서. 하여 거센 폭풍우에도 견딜 줄 알게 하시며 패배한 이에게는 사랑으로 대할 줄 알게 하소서. 맑은 마음 드높은 목적으로 살며 남을 지배하려 들기 전에 자신을 지배하며 미래를 향해 발돋움하면서도 과거를 잊지 않는 아이로 키우게 하소서. 아빠가 쓴 육아 일기 1969년 닭해 11월 10일 (음 10월 1일) 월요일 밤 11시 40분, 우리 아들 영진이가 박금자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그 기쁨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나는 유난히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들에게 기쁨과 감사를 전했다. 그 기분으로 육아일기를 써 보았고, 쓰다 보니 어린아기의 관찰 일기라 잘 정리해 두면 나중에 좋은 자료가 될 성싶어 계속 써 나갔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했다. 내 아들이 장가들 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재물이 아니라 '사랑'과 '정성'이어야 한다고 느꼈다. '사랑을 듬뿍 담은 이 일기장을 아들의 결혼 선물로 주리라'하는 생각이 들어 계속 썼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이제 그 당시의 기록을 읽어 보니 유치한 감이 들어 부끄럽기도 하지만, '아빠가 쓴 육아 일기'라는 점에서, 있는 그대로 간추려 공개한다. 1969년 11월 10일(음 10월 1일) (월) 첫눈, 바람, 맑음. "응애, 응애..." 도시의 정적을 뚫고 힘차게 울려 퍼지는 힘찬 고고성. 적막을 깨뜨리는 울음 소리는, 세상에 빛이 될 우리 아가 영진이가 탄생하는 소리다. 밤 11시 40분경. 너를 이 세상에 내놓기 위해, 너의 엄마 명아가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너는 아니? 네 엄마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속으로 울었단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단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제게 귀한 아들을 주시오니 감사하옵니다. 하느님, 이 아들이 나를 기쁘게 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온 만민을 기쁘게 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줄을 내가 압니다. 하느님이 주신 아들 정성껏 기르겠습니다, 하느님." 3,3kg. 정상 체중이다. 태어날 때 너무 힘이 들어 똥을 쌌단다. 새까만 머리털. 유난히 머리숱이 많다. 마치 1년이나 지난 아이의 머리털과 같다. 나올 때 힘이 들어 기계를 댔단다. 머리에 흔적이 역력하다. 고봉산처럼 부은 머리도 부기가 빠지면 가라앉겠지. 벌써 입을 오물오물거린다. 잠 재우다. 1969년 11월 11일 (화) 맑음.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이틀째, 아직도 나는 감격에 싸여 있다. 아기는 연방 "쩝쩝" 소리를 내며 젖 빠는 시늉을 한다. 배가 고픈 모양이다. 손가락을 입술에 대면 부리나케 빨아댄다. 오후에 보리차에 설탕을 타서 반 스푼 정도 먹였다. 하루 종일 자기만 한다. 낮에 똥을 한 번 쌌다. 배내똥이란다. 저녁 때 기저귀를 살펴보니 똥이 굳어 살에 엉겨 붙어 있다. 그래도 좋다고 잠이다. 부기가 많이 가셨다. 머리도 많이 들어갔다. 새까맣게 반짝이는 눈이 조그맣게 열려 있다. 코가 좀 바라졌다. 입이 크다. 귀가 정말로 백만 불짜리다. 두툼하고 큼직한 귀다. 귀밥이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잡힌다. 얼굴이 보통 애들보다 크다고 한다. 어른들 말씀으론 마치 3,7일(21일)이나 된 아이 같다고 감탄들이다. 아이를 보는 사람마다 큼직한 귀에 감탄이다. 훤한 이마에 땀띠가 약간 솟았다. 아비를 닮았다고 한다. 으쓱한 기분이다. 내가 보기에도 내 어릴 때 모습과 꼭 같은 것 같다. 성질도 닮았는지 그렇게 순할 수 있으랴? 1969년 11월 12일 (수) 맑음. 어제 밤에는 자주 칭얼거렸다. 아침에 여의사가 목욕을 시켜 주었다. 목욕을 시키고 나니 기분이 좋은지 잠에 취한다. 얼굴 모습이 더욱 또렷해졌다. 3시 반경 집으로 옮기다. 영진이 세상에 난 지 하루 좀 넘어 택시를 타 보는구나. 젖을 처음으로 먹였다. 입을 오무려 쪽쪽 빠는 모습이 너무도 귀엽다. 15분 정도 2번 먹였다. 3시간마다 먹이라고 한다. 보리찻물도 2번 먹였다. 똥을 2번 쌌다. 땀띠가 어제보다 더 났다. 하루 종일 잠에 취한다. 어르고 떠시는 어머니, 네 할머니의 기쁨. 명아의 모습도 개운한 것 같다. 입원비 만 원 치르다. 박 선생 수고에 보답하는 의미로, 어제 갈비 이천 원어치를 사다 드렸다. 명석 모친 이불 하나 만들어 오다. 서울 영진이의 외할머니 댁에 소식 전하다. 할머니가 안아 주는데 영진이 막 뻗친댄다. 문을 꽝 닫으니 깜짝 놀랜다. "어이구, 그놈 벌써 귀 떴구나?" 할머니 말씀이다. 1969년 11월 13일(목) 맑음. 아침에 빠이빠이를 하고 출근을 했다가 저녁 때 돌아와 보니 어이구, 우리 대통령, 얼굴이 환해졌다. 또렷한 얼굴 모습. 기쁨을 나타낼 수식어가 없다. 하루 종일 잠이다. 아기의 깨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귀찮게 굴어도 내가 알게 뭐냐는 식으로 곯아 떨어진다. 아침에 할머니가 목욕을 시켰다. 하루는 머리부터 아래로, 다음 날에는 발바닥부터 위로 번갈아가며 씻겨야만 살이 오른단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할머니는 이 원칙을 준수하실 모양이다. 젖을 오늘 6번 먹였다. 퉁퉁 불어서 아픈 젖 때문에 진이 엄마가 고생이다. 똥 6번. 노란 똥이다. 조금씩 지리는 통에 기저귀만 열난다. 아가야, 오늘은 네 엄마의 생일이란다. 명아에게 18금 1돈 선물하다. 아기 그네 사오다. 네 큰 숙모가 다녀갔단다. 복돈 500원과 함께. 1969년 11월 14일 (금) 비. 목욕을 잘못했는가? 귀엽다고 너무 귀찮게 굴었나? 아기가 재채기를 하더니 콧물을 흘린다. 낮에 똥이 새파랗다. 할머니가 급하게 사온 애기환 세 알을 젖 먹을 때 먹였더니, 보기 좋은 노란색으로 돌아왔다. 얼굴에 죤 디스가 왔는지 엷게 노란색이 깔렸다. 이마 부분의 땀띠는 사그라지고 목에 조맛조맛하게 고름이 잠겼다. 턱과 가슴이 붙어서 덥기 때문에 생긴 땀띠인가 했는데, 고름이 잠겨 있는 열꽃이란다. 건강해야지, 진아. 튼튼하게 자라는 거야. 훌륭히 되기 위한 밑바탕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키워지는 거란다. 젖 5번 먹다. 똥 7번. 낮에 한참을 울어댄다. 1969년 11월 15일 (토) 비. 귀여운 아가야. 자랑스런 아가야. 너를 볼 때마다 용솟음치는 기쁨. 아침에 엄마가 손수 목욕을 시켰단다. 아픈 몸을 제대로 추스리지도 못하는 엄마가 네 온몸을 정성스럽게 깨끗이 씻어 주었단다. 그렇게 잘 씻어 주었는데 울긴 왜 우니? 오만상을 찡그리고 울어대는 것이 아침 10시경부터 2시까지 울었더란다. 엄마가 오늘 박산부인과에 가서 산후 진료를 받았단다. 의사 선생님이 상태가 매우 좋다고 기뻐하셨단다. 네 얘기를 했단다. 몸상태니, 하루 일상 생활이니. 얼굴이 노랗게 되는 것은 정상이란다. 난 지 3,4일에서 10일 사이에 죤 디스가 엷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목에 고름이 잡히는 것도 별 것 아니란다. 보리차를 자주 주면 소화에 좋다는구먼.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단다. "백만 불짜리 아기이니 잘 키우세요." 아가야, 의사 선생님에게 "고맙습니다"해야지. 오후 3시경엔 네 큰 고모와 고모부가 오셨단다. "어이구, 그놈 마치 한 달은 된 놈 같구나." 고모부의 찬사에 이 아빠 어깨가 으쓱해지지 않겠니? 또릿또릿한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생긋 웃는 웃음이라니... "어머. 이놈 좀 봐, 눈을 뜨고 웃네." 고모의 찬탄에 온 가족은 기쁜 웃음에 잠겼단다. 변 5번. 노랗다. 젖 6번 먹이다. 보리차를 2번 주다. 입을 딱 벌리고 받아 먹는 모습. 아가야, 귀여운 아가야. 1969년 11월 16일 (일) 맑음. 크나큰 아픔으로 크나큰 기쁨이시니 엄마의 젖샘따라 사랑이 흘러라. 아가야. 귀여운 아가야. 오늘은 한 번도 안 울었구나. 아빠가 학교에 볼 일이 있어 저녁에 돌아오니 새근새근 잠들고 있지 않겠니? 저녁때 목욕을 시켰단다. 할머니, 아빠, 엄마가. 아빠가 좀 씻겨 주려 했더니 서툴러서 되겠니? 엄마에게 핀잔만 맞고 엄마에게 인계했단다. 머리는 아이보리 비누로 씻고, 온몸은 수건에 적셔 깨끗이 씻겼단다. 그리고 바디 파우더를 겨드랑이, 목, 잔등이, 사타구니, 볼기짝에 발랐단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며, 씻겨도 가만히 있지 않겠니? 목욕 후는 한참을 놀았단다. 눈을 굴리기도 하고, 고갯짓을 하기도 하고, 웅얼웅얼 소리를 내기도 했단다. 그러다간 눈을 살포시 감고 잠에 취하는 모습이란... 똥 8번 누다. 젖 5번, 보리차 2번 먹다. 엄마 젖이 적은 것 같아, 하루 종일 우울하다. 지금(밤 12시 10분)도 젖을 먹고 난 후 응얼응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놀고 있다. 귀여운 아가야. 1969년 11월 17일 (월) 맑음, 첫 얼음. 아가야, 오늘이 네가 난 지 한이레가 되는 날이구나. 엄마의 고통이 아직도 계속되는데 벌써 한이레가 지났으니. 이레가 되니까 이제 얼굴 모습이 확연히 나타나는구나.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네 귀여운 얼굴 모습이 아른거려 이 아빠의 생활은 정신이 없단다. 싱긋 웃는 모습, 응얼응얼 혼자 소리내며 노는 모습, 보리차를 받아먹다가 변이나 오줌을 쌀 때는 잠시 모든 동작을 중지하고 긴장하는 모습, 기저귀를 갈아 채우면 기분이 좋다고 두 다릴 쭉 뻗고 두 팔을 활짝 벌리는 모습, 발바닥을 간지를라치면 옴찔옴찔 발을 오무리는 모습, 젖 달라고 한 눈을 찡그리고 이리저리 고갯짓을 하는 모습,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혓바닥으로 쪽쪽 보리차를 받아 먹는 모습, 자그만 손을 꼭 쥐고 오만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고 세차게 울어대는 모습, 모습, 모습, 모습. 아가야, 깨물어 주고 싶은 아가야, 튼튼하게 무럭무럭 자라거라. 아빠 엄마의 소원은 오직 그것뿐이란다. 튼튼하게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이 세상에 좋은 일을 많이 해야지. 명아가 변 때문에 고생이다. 산후 한 번도 변을 못 봤다. 밤에 박 선생에게 찾아갔었지만, 관장은 균의 오염 때문에 안 된단다. 카라카스(관장약) 1알 먹다. 영진이 배꼽이 오늘 떨어지다. 이젠 의젓한 신사 양반이 된 것이다. 변 7번, 젖 6번. 얼굴에 죤 디스가 깊어 걱정이다. 보리차를 많이 먹이라 한다. 목욕시키다. 하나뿐인 외삼촌이 서울서 오셨다. 영진이를 보려고. 1969년 11월 18일 (화) 맑음, 흐림. 아가야, 오늘 목사님이 다녀 가셨단다. "이 귀한 아들을 이 가정에 내려 주신 아버님,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부디 바라옵기는 이 귀한 아들을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하옵소서." 아빠는 교회에 잘 다니지 않는단다. 엄마와 할머니는 열심히 다니지만... 그렇지만 네가 조금 자라면 아빠도 열심히 교회에 나가겠다. 너를 가슴에 꼭 껴안고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겠다. 그제는 할머니가 교회에 감사 헌금을 냈단다. "손자 탄생 감사 헌금"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써서 말이야. 변 6번, 젖 4번, 보리차 4번. 얼굴에 땀띠가 많이 돋았구나. 오른쪽 눈 밑에 조그맣게 열꽃이 났구나. 이마에 파우더를 허옇게 발랐단다. 노란 기운이 좀 가신 것 같다. 목욕시키다. 1969년 11월 21일 (금) 맑음. 아가야, 사진을 찍어줄 양으로 아빠 친구에게서 카메라를 빌려왔단다. 앞으로는 정기적으로 네 모습을 찍어 놓아야겠다. 두 손을 움켜쥐고 우는 모습, 발름발름 웃는 모습, 고요히 잠든 모습, 목욕시키는 모습, 귀여운 고추의 모습. 필름 한 통을 다 찍고 열어 보니, 이걸 어째? 필름이 끊어져 감기지가 않았구나. 광선이 들어 갔으니 공. 안타까운 실패였단다. 내일 모레, 일요일에 다시 잘 찍어 줄께 젖은 좀 천천히 먹어야지. 허겁지겁 먹다가 사레라도 들면 어쩌니? 젖 먹고 나면 딸국질이니 신사가 어디 됐니? 요샌 너를 위해 라디오를 밤낮 틀어 놓는단다. 그것도 명곡에만 맞추어서. 소위 정서 교육이지. 한 사람의 지능의 개발은 출생 후 6개월 이내에 이미 결정된다는구나. 젖 먹이는 방법, 목욕시키는 것, 모두가 의도적인 교육과 관련을 맺고 행해져야 한단다. 얼굴의 노른기가 많이 가셔졌다. 엄마가, 아는 소아과 의사에게 데리고 가겠다고 걱정을 한단다. 잘 자라야지. 1969년 11월 25일 (화) 흐림. 물처럼 영원히. 금처럼 참되게. 영진아, 너의 이름은 이미 네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지어 놓은 것이란다. 그렇다고 작명가에게 찾아간 것도 아니고, 고문을 들춰본 것도 아니란다. 단지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생활 신조를 너의 이름자에 그대로 붙여준 것이란다. 물은 끝없이 흐른다. 졸졸 시냇물이 흘러 대하를 이루고, 질펀하게 흐르는 강은 모이고 모여 바다를 이룬다. 영롱한 생기와 순결한 빛깔로 몇만 겁을 이어도 스러지지 않을 맑디 맑은 하느님의 선물. 인자는 요산이요, 지자는 요수라 하였으니, 물에 내포된 지혜로움은 또 얼마나 큰 것이리요. 영, 수와 빙의 합자. 물은 영원히 흐른다. 영원한 물처럼 영진아, 너의 이상도 너의 업적도, 영원히 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하여 참다운 너의 가치를 온 누리에 영원히 밝혀야 하지 않겠느냐? 진. 금과 진의 합자. 노란 빛으로 몇천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금. 인간은 쇠붙이 중에 금을 가장 고귀하게 여겨 왔다. 그 이유는 금이 갖는 그 희소 가치에 있을 것이다. 또한 이간은 참된 것으로 금을 꼽는다. 색깔의 광택이 불변이므로, 금붙이를 갖고 싶어하는 군중이 얼마나 많은가 살펴보라. 영진아, 네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인간이 되어라. 금처럼 참되게, 금처럼 광택 있게, 성실하고 참되어 누리에 빛이 될 수 있는 인간이 되어라. 세상이 아무리 혼탁할지라도 너는 굳세게 너의 포부를 펴 나가야 한다. 목욕 시키다. 밤에 몇 번이고 깨어 엄마를 애먹인다. 1969년 11월 27일 (목) 흐림. 아가야, 엄마가 오늘 아가 손톱을 깎아 줬대요. "거, 머리도 깎아 주지 그래." 나는 기분이 좋아 이렇게 말했단다. 정말 네 머리칼은 마치 1년 된 아이처럼 길단다. 그래서 귀밑 머리털은 귓바퀴를 덮을 지경이란다. 팔다리를 쭉 뻗고 기지개를 펼 때 보면, 하얗고 조그만 손이 옷 밖으로 쏙 나오는구나. 아, 귀여운 모습. 기저귀는 쉴 새 없이 갈아채지. 이젠 눈이 보이는 모양이지. 손을 눈 앞에 대고 이리저리 흔들면 눈동자가 쫓아온다고 엄마가 수선이다. 아가야, 밤에 좀 푸근히 자는 것이 어떨까? 1969년 11월 29일 (토) 흐림. 아가야, 곱게 잠든 아가야. 이 세상의 어떤 것이 너보다 순진하며, 이 세상의 어떤 것이 너보다 평온하랴?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참됨과 착함이 네 귀여운 얼굴에 자그마한 손에, 옴찔거리는 발가락에 담기었으니, 아가야, 복된 아가야, 너는 그대로 한 송이 꽃이로구나. "인간 화초" 너의 고모 말씀에 "인간 화초"란 말이 있다. 꽃처럼 아름다운 인간, 꽃과 같이 인간에게 안온한 웃음과 넘치는 희열을 부어 주는 인간, 네가 바로 인간 화초가 아니냐. 직장에서도, 길을 가다가도, 다방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너의 귀여운 모습. 아가야, 곱게 자라야지. 목욕시키지 않다. 열꽃이 번짐을 막기 위해서다. 똥질이 쉴 새 없다 1969년 11월 30일 (일) 흐림. 아빠가 사다 놓은 그네를 매었어요. 양쪽 벽에 목을 박고 그네를 조금 삐뚜름하게 매었어요. 두터운 이불을 그네 안에 펴 놓고 너를 카시밀론 이불에 싸서 눕혔어요. 울면 어쩌는지 아니? 흔들어 주는 거야. 조금 밀어 주면 오래도록 흔들흔들. 기분이 어때요? 안아 주는 걸 아는지 안았다가 내려 놓으면 칭얼칭얼. 그래서 그네를 맨 것이지. 방 안 공기가 따뜻하니까 괜찮을 거야. 오늘은 많이 칭얼대네. 내일은 병원에 데려가야겠어. 젖 먹는 양이 적다. 보통 2__3시간마다 젖을 먹는다. 엄마 젖이 부족하지 않은지? 변도 좋지 못하다. 1969년 12월 1일 (월) 흐림. 점심 시간을 틈 타 엄마와 함께 너를 데리고 병원에 갔었다. 몸에 자꾸만 생기는 열꽃이 걱정되어서란다. 마침 엄마 아는 사람이 의사여서 상담을 했지. 태열이라고 한단다. 나쁜 균이 접촉되어 그렇다는구나. 일본인이 지은 "나는 아기예요(와다구시와 아끼짱)"의 체질설과는 다르구나. 주사를 맞았단다. Pronapem 0.5cc. 주사 바늘이 너의 야들야들한 살을 꿰뚫다니... 아빠는 마음이 아팠단다. 곤히 자던 너는 주사침이 꽂히자 울음을 터뜨렸단다. 아빠는 주사라면 질색이다. 그저 튼튼해서 맞지 않고 자라는 것이 제일이지. 집에 돌아와 약을 젖에 개어 먹이고 온몸을 살펴보니 이제 웬일이니? 두 팔에 노란 부스럼 딱지가 쪼옥 깔렸구나. 신경질이 나서 엄마만 야단쳤다. 병원에 다시 가야겠다. 병원에서 체중을 달아 보니 3.8kg. 키 53cm였다. 빨리 포동포동해져야지. 목욕시키지 않다. 변이 잦다. 1969년 12월 2일 (화) 흐림. 네 앨범을 만들었단다. 전번에 찍은 사진을 찾아다가 앨범에 붙였다. 거침없이 들어낸 고추가 자랑스러운데 싱긋이 웃는 웃음이라니. 엄마 젖을 빠는 모습, 아빠가 코 끝에 안경을 걸고 너를 안고 있는 모습, 평화롭게 잠든 모습, 할머니가 똥을 치우는 모습, 팔 다리 웅크리고 허리를 밖으로 휘게 하고 잠든 모습... 갖가지 모습을 찍은 것이란다. 너의 성장 과정을 일기와 앨범에 담을 예정이다. 그래서 네가 장성하면 엄마 아빠의 정성의 선물로 줄 것이란다. 팔뚝의 부스럼 딱지가 어제와 마찬가지다. 내일은 점심 시간을 내어 병원에 가야겠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창백하구나. 안쓰러워 죽겠구나. 어서 뿌옇게 살이 쪄야지. 1969년 12월 3일 (수) 맑음. 병원에 갔었다. 아빠 엄마는 걱정이 태산 같은데 의사는 괜찮을 거라는구나. 지겨운 주사를 또 한 대 맞았지. 까르르 숨 넘어가는 울음 소리. 그렇게 주사침을 찌르고도 무표정한 간호원이 밉구나. 분홍색 연고를 가져왔단다. 온몸에 조금 이상한 데가 있으면 모두 발라줬지. 얼굴은 요새 계속 캄비손 연고를 발라선지 깨끗해졌다. 엄마가 네 손을 붙잡고 탄성을 지른다. "어머나, 요 손 좀 봐!" 아가야, 잔 병이 없어야지. 젖이 부족한지 깊은 잠을 취하지 못한다. 그리고 젖 먹는 시간의 간격도 짧아진다. 벌써 안아 주는 걸 아는지 안아 주어야만 잠이 든다. 큰일났어. 이러다간 의타심이 많아지겠어. 1969년 12월 4일 (목) 맑음. 엄마가 젖먹이 도구와 비오비타를 사왔어요. 선물 들어온 서울우유가 세 통 있으니까 우유를 많이 먹이려나 봐요. 우유병과 고무 젖꼭지를 물에 넣고 팔팔 끓인 다음, 우유를 표에 따라 70cc 정도 만들고, 거기에 비오비타를 통 속의 수저로 한 숟가락 탔어요. 엄마 젖을 알고 먹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잘 빨아먹는구먼. 젖꼭지를 입에 대니 그 빠는 모습이라니... 벌컥벌컥 켜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요. 일부러 간간이 젖꼭지를 빼주어 숨을 돌릴 수 있게 했어요. 고무 젖꼭지를 빨릴 때에도 꼭 안아 주어야 한대요. 그래야 푸근한 마음이 드는 모양이지? 한참을 빨아 먹더니 저절로 눈이 감겨져요. 어제 부스럼 치료 연고를 발랐더니 효과가 있었어요. 노란 딱지가 떨어지기 시작하는구먼. 목욕 안 하다. 우유 2번 먹이다. 1969년 12월 7일 (일) 완전히 눈 귀가 떠졌나 보다. 잠을 자다가도 문소리가 나면 깜짝 놀란다. 눈 앞에 손가락을 놀려 움직이면 까만 눈동자가 손끝을 쫓아온다. 이젠 시끄러운 소리를 못 내겠어. 우리 애기가 곤히 자는데 옆집 개는 왜 또 저렇게 짖어 대지? 멍멍 개야 짖지 마라. 꼬꼬 닭아 울지 마라.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시끄럽다. 몸을 튼다. 엄마 보고, 낮이고 밤이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낮게 틀어 주라고 일렀다. 천재 교육의 일보다. 몸이 거의 깨끗해진 것 같다. 고마워라. 1969년 12월 8일 (월) 엄마가 우리 아기 밤에 안 자서 밉대요. 낮에 잘 자다가도 밤이면 자주 깬단 말씀이야. 엄마 아빠가 잠에 떨어지고 보면 골탕 먹는 것은 우리 아기뿐. 배 고파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니 엄마는 기척도 없고. "젖 좀 먹여줘요!" 울음을 터뜨려도 잠든 엄마는 묵묵부답. 엄마를 깨우려고 한참을 울어대야 겨우 엄마는 졸린 눈을 비비니, 우리 아기가 얼마나 목이 아프겠어요? 엄마야, 아기를 예쁘게 키우려면 고생 좀 해야지. 밤엔 주기적으로 눈이 떠질 수 있도록 습관이 돼야 해요. 캄비손 바르다. 비누 없이 목욕하다. 팔이 완전한 것 같다. 젖 2시간 반 간격으로 먹다. 1969년 12월 9일 (화) 잠이 들어 있으면서도 쌜쭉쌜쭉 웃는 것은 벌써 즐거운 꿈을 꾸고 있는 증거일까? 아니면 아빠 품에 안겨 잔다고 한껏 기쁜 표정일까? 너의 배냇짓 웃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네 웃음을 보면 아빠의 시름은 눈 녹듯 사라진단다. 네 웃음으로 나의 가슴엔 함뿍 행복이 깃든단다. 아가야, 어서 자라요. 그래서 걸음마도 하고 "엄마, 아빠" 소리도 해야지. 우유를 다시 먹여 보다. 엄마 젖이 부족한지 투정을 부린다. 우유를 먹을 때의 자세도 젖 먹일 때와 같다. 꼭 끼어 안고서 젖꼭지를 물리면 허겁지겁 먹는다. 몇 번을 쉬고 먹어야 다 먹을 수 있다. 50cc 먹인 다음 잠시 곧추 세워 등을 쓸어 주면 트림을 한다. 우유와 함께 들어간 공기를 빼는 것이란다. 엄마가 아기의 발톱을 깎아 주었어요. 1969년 12월 16일 (화) 흐림, 눈. 아가야, 너의 앨범을 즐겁게 펼쳐보다가 너를 보니 문득 "야, 그놈 많이 컸다!"하는 생각이 드는 구나. 기저귀를 갈아 채울 때 다리를 잡아보니 살이 많이 쪘어요. 오늘도 우유를 50cc 정도 먹였대요. 변도 괜찮다는구먼. 그래 튼튼해야지. 발에 엄마가 짠 빨간 털양말이 신겨져 있네. 아가는 좋겠어. 엄마의 정성으로 짠 털양말을 다 신고. 찬 바람을 막는다고 엄마가 턱받개도 해 주었어요. 오늘은 참 잘 자네. 몸을 뒤틀고 칭얼댈 때 잠깐 안아서 토닥거려 주었더니 금방 잠이 들었어. 목욕시키지 않다. 변 정상. 1969년 12월 17일 (수) 눈. 아빠가 오늘은 아가에게 미안했어요. 저녁 때 엄마 젖을 먹기에 아빠가 살펴봤지. 오늘은 엄마 젖이 잘 나와요. 벌컥벌컥 켜는데 사레 들지 않을까 걱정이 돼요. 역시 우리 아긴 머리가 좋아. 한참 빨다가 젖의 양이 많이 나오면 입을 뒤로 빼서 젖꼭지를 내물리거든. 그러기를 일여덟 번. 잔뜩 먹었던 모양인지 엄마 젖꼭지를 뱉어내요. 그래도 자꾸 물리라고 했지. 얼마나 먹나 보려고. 그게 실수예요. 조금 빨더니 왈칵 젖을 게우지 않겠어요? 미안. 아빠 미안. 얼른 옆으로 안아서 씻어 주었단다. 목욕을 시켰단다. 얼굴에 아직도 땀띠 같은 것이 있다. 비오비타를 온수에 타서 먹였다. 잘 받아먹는다. 낮에는 똥을 무척 쌌대요. 그래서 예쁜 털양말도 버렸대요. 잠 잘 잔다. 1969년 12월 20일 (토) 흐림, 비. 아빠가 밤 늦게 들어와 미안해요. 친구들하고 오랜만에 술을 한 잔 했단다. 그러느라고 오늘은 너를 보아 주지 못했구나. 엄마 말이 오늘 하루 종일 잠투정을 했다는구나. 젖도 쉴 새 없이 먹고... 아빠가 저녁을 먹으려니 우리 아가 칭얼칭얼거렸어요. 그러더니 본격적으로 터지는데, 아휴, 바로 그게 진짜 울음이예요. 안아서 얼렀더니 막무가내. 발을 쭉쭉 뻗으며 보채는데 당할 길이 없다. "아가야, 우리 아가 젖 좀 먹여라." 엄마가 달려와 젖을 물려서야 겨우 울음이 그쳤다. 함숨까지 쉬어가며 젖을 먹으니, 이젠 보채는 방법이 달라졌는데. 큰 이모가 옷(온몸이 쑥 들어가는 슬리핑 백 같은 것)과 베비용 모포를 사 오셨다. 내일 서울 외할아버지 댁에 가자는데 아가 때문에 어떻게 가지? 1969년 12월 21일 (일) 흐림. 우리 아가 오늘은 참 착했어요. 아가를 데리고 엄마와 큰 이모, 이모부, 정숙이 누나, 아빠와 함께 서울 외할아버지 댁에 갔었어요. 외할아버지는 서울 문화촌에 사시는데 내외분과 외삼촌 내외, 막내 이모, 그리고 너보다 열흘 먼저 태어난 여자 아가와 함께 사신단다. 집 앞에서 택시를 타고 경인 고속도로를 달려 외할아버지 댁앞에서 내린 편안한 여행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방광염으로 굉장히 아파요. 하루하루 죽음의 길로 들어서고 있어요. 그래서 어린 영진일 데리고 가는 것이 힘들 줄 알면서도 무리를 한 거예요. 외할아버지 댁 아가는 여자라서 모습도, 행동도 여자답대요. 그런데 우리 아가는 얼마나 씩씩하고 장해요? 아빠가 우쭐했다면 우습지? 외할아버지 댁에서는 그저 잠만 잤어요. 눈을 떠서 젖을 먹이면 또 잠. 순한 아기라고 칭찬이 대단해요. 집에선 투정을 부리는데 오늘은 웬일이야.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을 끼쳤어요. 아가 귀에서 고름이 흘러 나왔지 뭐야. 온 집안 식구가 깜짝 놀랐어요. 아빤 가슴이 뜨끔했지. 귀가 아파서 어제 그렇게 보채고 울었던 모양이야. 내일은 당장 병원엘 가 봐야지. 귀가 아픈 쪽으로 눕지 않고 반대쪽으로만 누워서 왼쪽 머리가 들어갔어요. 목욕할 때 물이 들어간 까닭일까? 집에 와 할머니에게 말씀드렸더니 태중에 굴을 먹어서 그랬대요. 인천으로 내려올 때 고생했지 뭐야. 돈을 아끼느라고 한진버스로 왔더니 차내가 더워서 우리 아가가 땀을 뻘뻘 흘렸어요. 저녁을 먹으러 음식점에 들어가 기저귀를 보니 어이구, 아랫도리가 온통 똥으로 벌창이 되었어요. 집에 들어와 아랫도리만 물로 닦아 주고 옷을 갈아 입히니 편안한가 봐. 한참을 놀아요. 서울서 그렇게 놀았으면 좀 좋았겠어. 오늘은 수고 많았으니 푹 자요. 응? 1969년 12월 22일 (월) 흐림. 엄마와 함께 우리 아가가 병원에 갔었단다. 체중 4.75kg. 20일 동안에 1kg 늘었구나. 신장 55cm. 마찬가지로 2cm 커졌다. 어서 부지런히 자라야지. 귓병은 괜찮을 거란다. 너무 덥게 한 탓으로 고막 밖이 곪았단다. 치료를 하고 쓸신시럽을 20cc 가져왔다. 쓸신시럽을 먹이니 맛이 이상한 모양이지? 좋지 않은 얼굴을 짓더니 30cc 정도 먹고 나서 왈칵 다 토해 버렸다. 약맛을 알아서 큰일인데... 밤에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젖에 타서 먹였다. 낮에 잘 자더니 밤엔 웬 잠투성이 그리 심한지, 아빠가 너를 안아 재우느라고 혼났어요. 1969년 12월 23일 (화) 맑음. 아침 나절에 병원에 가서 트레시을 했다. 내일 한 번 더 와 보란다. B.C.G 접종을 1월 5일경 하기로 했다. 쓸신시럽 30cc 정도 먹이다. 저녁엔 아빠가 하숙 선생 7명을 초대하여 저녁 대접을 했다. 너에 대한 감탄사가 무수하니 아빠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엄마하고 약속하기를 낮에 재우지 않기로 했다. 낮에 실컷 자면 아빠만 고생 아니니? 변 2번. 점차로 변의 횟수가 준다. 젖 6번 정도. 낮에 목욕하다. 1969년 12월 24일 (수) 맑음. 크리스마스 이브. 아가야, 오늘은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일 전날이다. 아빠는 저녁 때 학생들을 데리고 송도에 있는 혜정 보육원을 찾았다. 부모를 여읜 고아들. 그 많은 떡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손가락에 붙은 것도 쪽쪽 빨아 먹는 꼬마들. 남루한 옷. 눈빛에 어린 서러움. 그들을 보면서 나는 우리 아가를 생각하였단다. 아가야, 불쌍한 사람을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동정으로 대하거라. 낮에 병원에 가다. 고름이 많이 나오다. 쓸신시럽 3cc 정도 먹이다. 엄마와 할머니가 고아원에 가져갈 떡을 만드느라고 부산했는데, 우리 아간 착하게도 울지 않았어요. 변 3번. 또릿또릿한 눈동자가 완전히 물체를 파악하는 모양이야. 서울서 경자 이모가 왔어요. 아가를 보러. 1969년 12월 25일 (목) 눈. 아가야, 메리크리스마스. 하느님의 축복 속에 무럭무럭 자라야지, 그렇지? 낮에 큰 이모부가 성훈이, 정숙일 데리고 왔었어요. 우리 아간 어쩜 잠이 들어 버려요. 엄마 친구 경자 이모가 "진인 참 바보같애. 어쩜 울질 않을까?"하고 걱정할 정도니까. 변의 횟수가 줄어든 대신 한 번 싸는 양이 굉장히 많아요. 기저귀를 넘어 아랫도리가 똥으로 벌창이 되었어요. 무엇이 눈에 보일까? 고개를 젖히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천정만 쳐다보네요. 저녁에 목욕을 했어요. 크리스마스 날인데도 선물을 못 사 줬어요. 다음에 아빠가 큼직한 선물을 할께. 옆집 국민 학교 신이가 아가에게 딸랑이를 선물했어요. 1969년 12월 27일 (토) 맑음. 영하 13도의 추위. 방안이 추워 엄마가 문에다 요 씌우개 타울을 쳐 놓았다. 아가에게도 내복을 입히고. 엄마가 아가에게 젖을 먹여 놓고 작은 이모네를 갖다 왔어도 우리 아간 착하게 혼자 놀았다. 아빠가 아가를 곧추 세우고 "둥기둥기"도 해 주고 아가 손으로 박자를 맞추며 노래도 불렀다. 고사리 같은 손아귀에 아빠 엄지 가락을 넣어 주면 꼭 쥔다. 손힘이 예상 외로 세다. 기저귀를 벌창을 해 놓도록 변을 보았다. 한 번. 목욕시키다. 1969년 12월 28일 (월) 맑음, 눈. "옹알 옹알" '엄마' 소리를 비슷하게 냈다고 집안 식구가 활짝 웃음꽃을 피웠었다. 젖만 먹여 놓으면 O.K. 낑낑대다가도 아무도 보아 주지 않으면 저 혼자 논다. 저녁에 아빠 엄마가 옆집 사모님이 입원한 병원에 문병 갔었다. 갔다 오니 한숨 잤다고. 엄마가 아빠보고 야단이다. 우리 영진일 큰 애 다루듯 하지 말라고 엄마가 그러면서 말이다. 볼이 좀더 밑으로 처진 것 같다. 어서 부옇게 살이 쪄야지. 얼굴에 도톨토톨 돋은 것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구먼. 변 3번 보다. 할머니랑 아빠가 많이 안아 주었지. 1969년 12월 29일 (월) 맑음. 아가가 잠에 취했나 봐. 젖을 먹이면 잠이니. 엄마가 젖이 불었다고 잠든 아가를 깨워도 막무가내야. 두 손을 번쩍 머리 위로 쳐들고 잠에 취한 네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와요. 아침에 목욕을 시켰어. 아빠가 머리와 두 손을 잡아 주고 엄마가 씻겼지. 얼굴을 씻을 땐 얌전하더니 몸을 씻으니까 싫은 모양이야. 막 울어대거든. 변의 양이 요샌 많아졌어. 대신 횟수는 줄고. 3번 변 보다. 오늘은 하루 종일 별로 눈 뜬 진이를 못 보다. 1969년 12월 30일 (화) 눈. 아가야, 고운 눈썹 살포시 감고 꿈길 속에서 웃음 짓는 아가야, 너를 가슴에 꼭 껴안고 토닥토닥 해 주노라면 아빠 얼굴도 아가 닮아, 아빠 얼굴도 아가 닮아, 주름진 눈매에 웃음이 저절로 흘러라. 옆집 아줌마가 우리 진이 귀여워 죽겠대요. 한참을 업어줬대요. 고운 털양말도 짜오고. 밤에 엄마 젖을 한참 빨더니 꾸루룩꾸루룩 똥을 쌌어요. 엄마도 아빠도 깜짝 놀랐어요. 기저귀를 보니 많이 쌌더구먼. 젖을 먹고 난 후는 한참을 놀았어요. 엄마가 한참을 안아 줘도 안 잔다고 아빠더러 보래요. 내가 안고 토닥거려 주니 금방 잠이 들어요. 아빠가 최고지? 변 3번. 1969년 12월 31일 (수) 맑음. 닭해의 마지막 날. 이제 시간 여만 있으면 제야의 종소리가 온 누리에 울려 퍼질 것이다. 69년. 이제 60년대는 마감을 고한다. 그리고 내 고난의 삶도 추억을 남기고 스러져 갈 것이다.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웅비를 기약하는 70년대가 내 앞에는 펼쳐질 것이다. 아가야, 너는 우리의 복동이. 69년은 우리의 사랑을 꽃피우게 했고, 그 결실로 귀한 너를 우리에게 내려 주셨다. 자 70년대를 위해 힘차게 전진하자. 아가 얼굴에 열꽃이 또 돋나 봐. 걱정이야. 머리엔 쇠똥이 앉았나 봐. 먹으면 잠. 아빠하곤 언제 놀지? 낮에 목욕시키다. 많이 울었단다. 저녁 때에는 꾸루룩꾸루룩 방귀를 뀌길래 살펴보니 불알이 잠기도록 똥을 쌌어요. 걱정이야. 왜 된똥을 못 싸지? 아가 난지 50일째. 1970년 1월 1일 (목) 맑음.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간지로 따지면 개해. 충직한 개처럼, 금년 한 해는 인간 사이에 믿음이 심어지기를... 아가야. 오늘은 설날.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올해는 우리 가정에도 만복이 오겠지. 우리 아가도 튼튼해지고. 아빠가 오늘은 늦게 왔어요. 그래서 우리 아가를 한 번도 안아 주지 못했어. 미안해요. 방안에서 가스 냄새가 나는가 봐. 아가가 구역질을 많이 했대. 토하기도 했다는구먼. 엄마는 머리가 아프대요. 난로를 살펴 봐도 가스가 샌다는 확증이 없어.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켰지만, 글쎄 우리 아가가 괜찮을까? 변 2번. 한 번은 조금, 한 번은 많이. 목욕은 안 시키고. 변을 못 봐서 그런지 낮에는 많이 칭얼거렸대. 또 구역질을 안 할는지 근심이야. 1970년 1월 2일 (금) 맑음. 할머니가 얼마나 우리 아가를 예뻐하시는지. 할머니가 금년으로 65세가 되신다. 평생을 고생으로 일관하신 분이 늦으막에 손자를 보셨으니 얼마나 즐거우시겠니? 그저 시간만 있으면 자는 아가를 깨워 안으시고 얼러 주신다. 뽀뽀는 안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입을 쪽쪽 맞추시는 모습이 흐뭇하면서도 불안스럽다. 오늘 많이 보챘대요. 변 보기가 힘든 모양이야. 구역질이 여전한데 병원에 예방 주사 맞으러 갈 때 알아 보아야겠어. 오른쪽 귀앓이가 나아진 것 같은데, 왼쪽 귀에서도 귀지가 나왔대요. 낮에 비오비타를 엄마 젖에 타서 먹였더니 받아 먹다가 먹기 싫은지 혓바닥으로 내밀어 버리더래요. 밤엔, 낮에 보챈 덕으로 푹 잤어요. 1970년 1월 3일 (토) 맑음. "우리 아긴 참 착해요. 잘 때 샛눈 뜨고 자서 탈이지..." 엄마의 웃음의 말처럼 요사인 참 착해요. 오늘은 엄마가 많이 나다녔는데 별로 울지 않았어요. 엄마가 없을 때 아가가 울어서 아빠가 안아 주었지. 젖이 먹고 싶었던가 봐. 고갯짓을 하면서 빠는 시늉을 해. 토닥거려 주었더니 칭얼거리다가 잠이 들어 버렸어. 엄마가 오면 야단을 쳐야지. 아가를 버려 두고 엄만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거야? 변이 이제는 1__3회로 줄었어요. 양은 엄청나게 많게. 기저귀가 온통 똥천지가 되니까. 구역질을 아직도 해. 내일 모레 예방 주사 맞는 날이 빨리 와야지. 속눈썹이 예쁘게 나왔어요. 아, 사랑스런 우리 아가. 1970년 1월 5일 (월) 눈. 29년만의 추위라나? 영하 20도 2'. 너무 추워서 병원행을 연기했어요. 대신 전화를 걸어 보았더니 흔히 그럴 수 있다고. 종일 변을 못 보니 엄마의 불안은 대단한 모양. 약국에 가서 관장약을 사 왔어요. 관장을 시키고 조금 있으니 아기가 변을 보려고 힘을 주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나오는 변. 엄마는 눈물이 나도록 기뻤다는구나. 변을 보고 나니까 시원한 모양이지. 젖도 잘 먹고, 흥얼흥얼 놀기도 잘한다. 의젓한 모습. "날 닮아서 순해." 아빠가 으쓱하면 엄마는 살포시 웃음만 흘리지. 아가야, 예쁜 아가의 모습에 아빠는 하루 종일 취하는구나. 요람에 눕히다. 1970년 1월 6일 (화) 흐림. 낮에 엄마가 아가를 데리고 도립병원에 갔었다. 체중 5.2kg 신장 56cm 머리둘레 39cm. 예방주사 맞다. D.P.T와 소아마비 백신. 양쪽 엉덩이에 맞았는데 왼쪽 엉덩인 불쑥 부어 올랐다. 무척 아픈 모양이야. 종일을 꽁꽁 앓아요. 젖을 먹을 때도 꽁알꽁알거려요. 안아 주다가, 어쩌다 아픈 엉덩일 건드리면 기겁을 하고 앓는 소리야. 눕히면 엉덩이가 닿는 모양이야. 그저 안아만 달래. 하도 꽁꽁거리길래 약 먹이다. A.P.B.인 모양이야. 그런데 이런 깍쟁이가 있나. 전부 뱉아 버리네. 부은 곳(주사 맞은 자리)을 더운 물 찜질해 주다. 변 안 보다. 하루 종일 앓는 소리. 아가야, 너의 아픔은 엄마 아빠의 아픔. 의당이 아플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엄마 아빠 얼굴은 근심에 차 있구나. 내일은 괜찮겠지. 1970년 1월 7일 (수) 흐림. 예방 주사를 맞고 어제 하루 종일 꽁꽁대더니 두 눈이 해쓱해졌어요. 어제부터 변을 못 보아서 그런지 불편한 표정야. 누워 있으려고 하질 않아, 엄마 아빠가 번갈아 안아 주다가 나중엔 요람에 눕혔지. "관장이라도 할까요?" 엄마는 한껏 걱정스러운가 봐. "좀 더 기다려봐요." 아빤 그래도 대담하지? 한참을 끙끙거렸어요. 이상하다고 엄마가 기저귀를 보니, 아, 누렇고 된 똥을 한 함지박 싸 놓았어요. 엄마는 탄성을 연발했어. 눈물이 글썽해가지고. 어쩜 그렇게 차질 수가 있을까? 그런 똥을 누려니 힘이 들지. 변을 보고 나니 개운한가 봐. 옹알옹알거리며 곧잘 놀아요. 내일부터 다시 건강해져야지. 1970년 1월 8일 (목) 흐림. 잘 잤어요, 우리 아가? 아침에 어제처럼 차진 똥을 벌창이 되게 싸 놓더니만 낮에 싼 변은 이상했어요. 좀 묽고 덩어리진 변에 핏기가 보였어. 변 보기가 힘들어서 그런가 걱정야. 저녁 때에는 목욕을 시켰지. 굉장히 울던데. 목욕을 시키고 나면 얼굴에 붉은 반점이 생겨요. 피부가 나쁜가 봐. 얇게 캄비손을 발라 주었지. 목욕을 시키고 나니까 잠이 오나 봐. 스르르 눈을 감는 것을 엄마가 굳이 깨워 젖을 먹였어요. 푸근히 자라고. 할머니께서 감기가 많이 드셨어. 아가에게 옮을까 봐 아가 방에 들어오기를 꺼려 하셔요. 어서 들어오시라고 그랬더니 들어오셔서 너를 봐 주셨어. 얼굴을 옆으로 돌리시고 말이야. 아가야, "할머니 빨리 나으셔요."해야지. 네가 있어 사는 보람을 느끼신다는 할머니시잖니? 아가가 요샌 혓바닥을 자주 놀려요. 노는 것인가? 1970년 1월 9일 (금) 흐림. 어제 밤엔 아빠 엄마가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우리 아가가 많이 아팠던가 봐. 잠들지 못하고 어쩌나 울어대는지... 귀가 아픈 모양이에요. 왼쪽 귀를 건드리면, 울음이 터져 나와요. 지난번에 오른쪽 귀를 앓더니 이번엔 왼쪽 귀인가? 걱정야. 아침에 엄마가 아가를 데리고 당장 병원 행. 김순철 이비인후과. 귀속 중 가장 아픈 데가 부었대요. 치료하고 주사 맞고 약 가져 오고, 귀에 C.M. 적신 신을 넣고 반창고를 붙였어요. 약을 먹였더니 비위에 맞지 않은가 봐. 전부 토해 버렸어. 무서워서 어디 약을 먹이겠어? 그래도 병원에 갔다오니까 조금은 시원한 모양이야. 시끄럽게 울어대지는 않았어. 젖이 부족한 것 같아서 우유 50CC 정도 먹였어요. 아가야, 오늘은 푹 자야지. 1970년 1월 10일 (토) 눈. 엄마가 아침에 병원에 데리고 갔었대. 의사 선생님 말씀이 부은 곳이 많이 가라앉았대요. 치료하고 왔어요. 그런데 기침이 심해. 전에도 기침과 재치기를 가끔 했지만 의사 선생님이 진찰을 해 보고 이상이 없다고 해서 안심을 했는데 오늘 기침은 그런 류가 아냐. 자주 하면서도 깊은 기침야. 감긴가? 그런데 열은 없어요. 기관지염? 폐렴? 불안해서 견딜 수 있나? 병원에 가자니 시간이 토요일이라 맞질 않고. 엄마가 병원에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의사 선생님은 벌써 퇴근했대요. 엄마가 약방에 가서 하이돈 시럽을 사왔어요. 1.5ml씩 두 번을 먹여 보았지만, 모르겠어, 나아지는건지. 따뜻하게 해 주느라고 했더니 얼굴에 도톨도톨한 것이 돋기 시작했어요. 저녁 때 어제 못 본 변까지 합쳐 똥을 굉장히 많이 쌌대요. 아가야, 엄마는 피곤해서 죽겠대요. 내일은 건강해지는 거지? 1970년 1월 11일 (일) 흐림, 눈. 주안 이모네 갔었대요. 그리고 병원 해. 의사 선생님이 점심 식사하느라고 잠시 쉬는 사이에 환자가 굉장히 밀렸대요. "병원에서 똥을 얼마나 많이 쌌던지 혼났어요." 그래서 엄마는 내복이랑 옷을 빨았대요. 신사가 아무 데서나 행세를 하면 되나? 의사 선생님이 환자를 보는 중에 어느 한 아기가 많이 울었대요. 그랬더니 우리 진이도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대지? 주사 맞을 땐 까르르 숨이 넘어가는 것 같이 울더래요. 엄마가 놀랬대. 아마 병원에 온 줄을 안 모양이지? 왼쪽 귀는 거의 나았는데 오른쪽 귀에 부기가 조금 있대요. 너무 덥게 해 주지 말라고. 집에 와선 별로 울지 않았대요. 아빠하고 밤에 한참 놀다 잠들었지. 얼러 주면 벙긋벙긋 웃는 귀여운 모습. 1970년 1월 12일 (월) 흐림. 역시 영진인 착한 아가야. 아빠하고 놀다가 자다가, 그렇게 하루 해를 보냈어요. 아침에 목욕을 시켜 주었지. 오랜만의 목욕야. 귀가 아프다고 해서 삼 일을 못 씻겼거든. 아빠가 옆에서 얼러 주었더니 울지 않았어요. 아가는 아빠 닮아 피부가 나쁜가봐. 목욕을 시키고 나니까 얼굴 전체에 열꽃이 쪽 돋았어요. 옷을 갈아 입히고 캄비손을 발라 주었지. 이젠 아빠 얼굴을 쳐다보고 마주 웃는 웃음이 익숙해졌어. "더어꾹"하고 턱을 까불어 주면 눈썹이 치붙으면서 활짝 웃어요. 이젠 아빠하고 노는 것일 제법야. 안은 것이 맘에 맞지 않으면 막 뻗대요. 고개를 뒤로 빳빳이 세우고 두 다리로 탁탁 걷어 차는 통에 잘 가누질 못하겠어. 어제 아빠가 친구네 집 아가를 보고 느꼈지만, 우리 아간 성장이 빠른 게 아닐까? 밤에 엄마와 극장 구경을 잠깐 갔다 와서 미안해요. 1970년 1월 13일 (화) 아가야, 아빠는 방학 중이라, 언제나 아가와 함께 지내요. 아가를 관찰하며 이 글을 쓰는 것도 선생님이 가지는 특권, 방학 때문 아니겠니? 어제 병원에 가지 않았었는데 귓속의 솜을 뽑아보았더니 고름이 흘렀어요. 오늘 엄마가 데리고 병원에 갔었지. 요새 며칠 병원에 가는 바람에 아기를 업는 데 익숙해졌대요. 병원에서는 별로 울지 않았다나. 이젠 거의 다 나았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 이젠 사람 좇아서 웃는 웃음이 제법야. 곁에 아무도 없으면 칭얼대거든. 잘 땐 안아 주어야만 하지. 아가야. 어쩜 이젠 분별이 가는가 봐. 가만히 안아 주기만 하면 잘 안 자요. 자장가를 불러 주어야 사르르 잠이 들지. 그 통에 아빠의 보잘것없는 노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단다. 아가야, 밤에 잘 자서 아빠 엄마가 한결 편해요. 1970년 1월 14일 (수) 맑음. 아침엔 그저 잠자는 게 일. 잠이 깨서 엄마가 젖을 먹이면 한동안을 놀지. 무릎 위에 곧추 안아 주면 고개를 제대로 가누질 못해 이리 끄덕 저리 끄덕. 그러다가도 고갯짓을 휘휘 해대요. 머리가 많이 찌그러졌어요. 왼쪽으로만 고개를 돌리고 자 버릇해서 왼쪽 머리가 들어갔어요. 걱정이 되어 고개를 오른쪽으로 해주면 금방 왼쪽행. 습관이 되었나 봐. 그러다 흉 잡히겠어. 저녁 때 엄마가 안아 주고 있으려니 끙끙 힘을 주더래요. 기저귀를 살펴보니 똥천지. 똥이 흘러 잔등이까지 갔다고. 내복까지 홀딱 갈아입혔대요. 그리고 목욕도 시켜야만 했대요. 삼 일만에 변을 보아서 그렇게 양이 많았을까? 내용물은 곱고 색깔도 좋더라고. 1970년 1월 17일 (토) 맑음. 엄마가 노란 스웨터를 다 짰어요. 노란 털실 바탕에 하얀 무늬를 넣어서. 앞섶에도 하얀 털실로 대었어요. 소매는 반소매로 나팔형으로 짰어요. 입혀 보니 꼭 맞아요. 참 예뻐. 낮에 아빠하고 한참을 놀았지. 아빠 무릎에 앉히고 아빠가 아가 두 손을 잡고 권투놀이를 했어요. "청 코너 서영진. 당년 2달 7일. 체중 5.6kg 신장 58cm. 머리둘레 40cm. 일명 사각의 표범 와!" 체중, 신장 등은 지난 번에 잰 치수에 약간씩 늘린 것이야. 그리고 두 주먹을 휘두르며 한참 법석을 떨었지. 저녁 때 끙끙 힘을 주더니 똥을 쌌어요. 기저귀로 닦아 주는데도 꾸역꾸역 나오지 뭐야. 우리 아가 최고야. 밤엔 잘 잤어요. 눈 다락지도 없어지려나 봐. 1970년 1월 18일 (일) 맑음. 엄마가 큰 이모, 이모부와 함께 아침에 서울 갔었어요. 외조부 병환이 중하시다고 해서. 아가는 아빠, 할머니가 봐 주기로 했지. 엄마가 갈 때 젖을 실컷 먹여서 한참을 잤어요. 1시 반경 배고프다고 울길래 우유를 140cc정도 비오비타를 타서 먹였지. 아주 잘 먹어요. 잔등을 쓸어 주었더니 트림도 멋있게 하고. 요람에 뉘어 한참을 자나 보다 했더니, 3시경 전부 토해 버렸어 우유가 응고돼 두부처럼 된 것을. 한참 부산을 떨었지. 힘이 드는가 봐. 그냥 잠에 취했어. 5시경, 눈을 뜨고 가만히 있길래 우유를 다시 먹이려고 했더니, 당최 고무젖꼭지를 빨려고 들질 않아, 혓바닥으로 내밀어 버려요. 몇 번을 시도했지만 실패. 먼저 먹은 우유가 좋지 않았던가 봐. 힘이 없는 듯 가만히 눈을 감고 배고픈 줄도 모르나 봐. 엄마가 있어야 되겠어. 정말 엄마 없으면 한 데야. 6시 반경 엄마가 왔을 때 한숨을 내쉬었지. 엄마 젖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하더군. 이제 우리 영진이 기분 좋지? 1970년 1월 19일 (월) 맑음. 아가가 아침에 잘 자고 깨었어요. 아빠가 요샌 출근을 안 하기 때문에 우리 아가를 잘 봐 주지. "누가 그랬어? 우리 영진이 누가 그랬어?" 아가를 안고 얼러 주면 옹알옹알대고 웃는 모습. 깨물어 주고 싶도록 예쁘다. 야단을 치는 것도 아는 모양이다. 왜 혼자 놀지 못하느냐고 야단을 치면 입을 삐죽삐죽거리다가 "응아"하고 울어 버린다. 젖 먹는 것을 야단을 쳤더니 젖꼭질 입에 물고 울어 버린다. 집안 식구가 한참을 웃었다. 벌써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저녁 때 아기를 눕혀 놓고 엄마가 밖에 나갔더니 울고 야단이다. 응석이 대단하다. 벌써 자기만 보아 달라고 하는군. 똥을 세 번씩이나 쌌다. 양이 굉장히 많다. 목욕시키다. 살이 많이 올랐다. 1970년 1월 20일(화) 맑음. 젖만 제때 공급해 주면 우리 아가는 아무 문제 없다. 그러나 엄마의 젖이 부족한 모양이다. 젖꼭지를 물고 젖이 잘 안 나온다고 칭얼거린다. 엄마 말이 젖이 불 사이가 없이 빨아대니 그렇단다. 뒷머리가 많이 납짝해졌다. 엎어서 뉘어 보았더니 버둥버둥 거리며 고개를 들어 좌우로 움직인다. 제법이다. 그러나 낑낑거려서 금방 바로 뉘였다. 옆으로, 앞으로, 뒤로, 번갈아가며 눕히든지 해야겠다. 아가 사진을 찾았는데 필름이 나쁜 것을 사용해서 흠집이 많이 났다. 겨우 일곱 장을 추려서 아가 앨범에 붙였다. 목욕하는 장면을 찍었더니, 벌거벗은 모습이 가관이다. 마치 돌 지난 아이처럼 의젓하고 든든하다. 얼굴이 시원하게 생겨 아빠 엄마가 끝없는 미소를 지었다. 아가야, 사내 대장부답게 자라거라. 1970년 1월 21일 (수) 흐림. 오늘은 아빠의 생일이란다.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많이 장만해서 식구끼리 먹었다. 이제 27살인가? 아빤 나이를 잘 모른단다. 어느 땐 29,30살까지도 된단다. 출생 연월일이 호적과 맞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20대는 그렇게 빠르게 흐르는지도 모른다. 나이 27살에 한 살 (우리 나이로)난 아들을 두었으니 아빠도 상당히 빠른 셈이다. '아빠가 환갑일 땐 우리 영진이가 33살이 되나?'하고 생각하다가 혼자 픽 웃었다. 벌써 늙었을 때 일을 생각하고 있으니 아빠는 주책이다. 어서 영진이가 더 자라기 전에, 우리 영진이가 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어야겠는데 이젠 아빠는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앞일을 계획해야겠다. 사랑하는 우리 아가 영진일 위해서. 아가가 오늘은 잘 놀았다. 저녁 때 목욕했다. 이틀만큼씩 목욕이다. 이젠 준비한 옷이 맞질 않는단다. 낮에 된팥죽 같은 똥을 한 사발 쌌지. 1970년 1월 22일 (목) 흐림. 요즘은 젖만 빤다고 엄마가 걱정이다. 오늘은 잠도 잘 안 자고 칭얼거렸대요. 아빠가 저녁 때 한참을 얼러 주었지. 벌죽벌죽 웃는 웃음은 아빠를 완전히 사로잡는다. 예뻐 죽겠어. 젖을 먹는데 이마에 땀이 촉촉히 배었어. 손도 차요. 팔뚝을 걷어 보니 땀기가 있어. 발도 마찬가지. 몸이 약한가? 아빠 체질을 닮아 그런가? 엄마가 아기 발가락을 보고 아빨 놀려요. 발가락도 닮았다고. 예쁘고 입고 전부 아빠 닮았다는 거지. 아가의 자는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려면 아빤 뽀뽀를 해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구나. 1970년 1월 23일 (금) 맑음. 우리 아가 예쁜 아가 사랑스런 아가 고운 눈매 빨간 입술 싱그러운 웃음 아빠 품에 안겨서 자장 노래 들으며 사르르 두 눈 감고 꿈나라 찾지요. 아빤 즉흥적으로 "이별의 왈츠"에 이런 가사를 붙여 자장가를 부른다. 아가를 안고 방 안을 거닐며 노래를 부를 땐 모든 노래가 자장가로 변한다. 찬송가도, 유행가도, 동요도, 명곡도... 자장가. 얼마나 포근한 말인가? 귀여운 아가를 안고 노래에 맞춰 도닥도닥거리는 엄마, 아빠의 모습. 그래서 아가는 고운 미소를 머금고 먼 꿈나라로 천사 친구를 만나러 간다. 언제 잠투정을 했느냐는 듯 사르르 감은 두 눈엔 가지런한 속눈썹이 평온 속에 젖어 있다. 아가의 잠든 모습을 들여다보는 엄마 아빠의 가슴에도 충만한 사랑과 행복이 출렁거린다. 잔잔히 흘러 나오는 자장가 노래. 자장가,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노래 중 가장 아름다운 노래다. 아! 어느 노래 있어 자장가처럼 포근한 노래가 있으랴? 어느 노래 있어 자장가처럼 사랑에 충만한 노래가 있으랴? 자장가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자장가 소리에 잠든 아가는 사랑을 배운다. 그리고 포근하고 아늑한 여울 속에서 티 없이 맑은 영혼을 키운다. 자장가여! 아름다운 노래여! 옹알옹알거리며 잘 놀았다. 잠도 잘 잤지. 똥을 질펀하게 싸 놓고. 두 다리를 들고 있는데도 꾸역꾸역 나오는 똥이여! 목욕하다.